거꾸로 된 세계 지도로 유명한 사람 중에는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이 있다. 원양어선 선장 출신에 자수성가한 창업주인 그는 한국인에게 해양의 중요성을 호소하기 위해 지도를 뒤집었고, 긍정적 반향을 얻었다.
반면 최근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이 주한미군 홈페이지에 게재한 '동쪽이 위인 지도(East-Up Map)'와 그 배경 설명은 한국 내 적잖은 논란과 경계심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동쪽을 위로 하는 지도의 접근법은 전통적 지도 방식에선 가려져 있던 인도태평양에서의 (미국과 동맹국 간) 전략적 관계와 우위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이는 '지도는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권력의 담론'이라는 지정학적 명제에 충실한 설명이다.
'브런슨 지도' 공개…日 열도가 中 포위, 가상 표적까지 거리도 표시
브런슨 사령관의 말처럼 뒤집힌 동아시아 지도는 일본이 중국의 해양 진출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일본의 본섬 4개와 그로부터 대만까지 점점이 이어지는 열도가 활 모양을 그리며 중국을 동중국해 안에 가둬놓고 있다.
중국 함대가 태평양으로 나가려면 촘촘히 박힌 일본 섬들과 대만의 군사 감시망을 통과해야 한다. 러시아 역시 블라디보스톡에서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면 남쪽의 대한해협이나 북쪽의 라페루즈 해협(사할린-홋카이도)을 지나야 한다. 그리하여 동중국해와 동해는 사실상 동아시아의 지중해인 셈이다.
브런슨의 지도에서 더욱 특기할 점은 주한미군 평택기지(캠프 험프리스)를 중심으로 베이징과 평양, 도쿄, 타이페이, 마닐라 등까지의 거리를 방사형 점선으로 그려놓은 것이다. 이는 단지 지도를 뒤집어놓은 수준을 넘어 미국의 지정학 셈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브런슨 사령관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는 "한반도에 이미 배치된 군대는 (유사시) 보강이 필요한 원거리 자산이 아니라, 위기나 비상사태 시 미국이 돌파해야 할 방어권 내부에 이미 포진된 병력"이라 했다.
이를 주한미군 감축이나 위상 격하에 반대하는 것쯤으로 여기고 반길 수만은 없다. 그는 "관점의 전환은 한국이 자연스러운 전략적 축으로서의 역할을 부각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캠프 험프리스에서 평양까지 158마일, 베이징은 612마일, 블라디보스톡은 500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했다. 그보다도 훨씬 가까운 중국 주요 군항인 댜렌, 칭다오, 닝보 등은 거리 표기가 생략됐다.
그의 말대로 대한민국은 동아시아 지중해 한복판에 자리한 채 어느 가상 표적이라도 지척에서 겨눌 수 있는 입지에 있다. 과연 한국은 그의 말마따나 중국과 일본 사이에 '고정된 항공모함'이다.
한국은 '동아시아 지중해'에 고정된 항모…中 찌르는 삼각 꼭짓점
브런슨 사령관이 한국의 '전략적 축' 역할을 띄우는 것도 우리에게 큰 부담이다.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을 넘어 아예 한국군의 역내 기여를 압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일본-필리핀을 연결하는 삼각형의 상호보완성을 언급하며 "한국은 역내 전략적 깊이와 중심적 위치를 제공하고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비용 부과라는 추가적 이점도 지닌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삼각 꼭짓점은 한국이 대륙을 위에서 아래로 찌르는 압정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그의 주장대로 일본은 첨단 기술역량으로, 필리핀은 해상로 통제권으로 '삼각구도'에 기여하며 다소 먼 발치에 떨어져있는 가운데, 한국은 캠프 험프리스를 필두로 최전방에 서게 된다.
사실 미군의 동아시아 지도 뒤집어 보기는 이미 한참 전 시작됐다. 한 안보 전문가는 약 7년 전 주일미군 기지 방문 때 비슷한 지도를 봤던 경험을 소개하며 "미국의 오래 된 구상"이라고 했다.
그 뿐 아니다. 일본 정부도 방위성·자위대 홈페이지에 뒤집힌 동아시아 지도를 게재하는 등 미국의 대중 전략에 밀착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다. 만약 브런슨 사령관의 말처럼, 한국이 긍정적 의미에서 '전략적 축'이라면 일본이 사용할 리 없는 지도다.
"큰 힘에는 큰 책임"…美 육군장관·해군총장 등 잇단 압박성 발언
브런슨 지도는 최근 미국 주요 당국자들의 한국군 역할과 관련한 잇단 발언과 맞물려 더욱 비상한 주의를 끈다.
지난달 초 방한한 대니얼 드리스콜 미 육군장관은 주한미군 임무에 대해 중국과 북한 위협 모두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달 중순 방한한 대럴 커들 미국 해군참모총장은 대만 유사시와 관련해 "(한국군도) 분명히 일정한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준 국방대학교 교수는 "주한미군이 (북한보다는) 중국 때문에 주둔하는 것이라는, 미국으로선 당연한 얘기를 이제 대놓고 하는 것이고, 한국도 북한 타령 그만하고 (중국 봉쇄에) 적극 동참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이 같은 압력은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보유와도 연동되며 한국의 방향 수정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는 지난 20일 한국 핵잠 '승인'이 역내 도전 대응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앞서 커들 미 해군총장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면서 한국 핵잠이 중국 억제에 활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예측"이라고 더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핵잠 문제는 아직 세부적인 최종 합의에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미국 측은 이를 지렛대로 한국의 선택지를 좁히려는 것이다.
임을출 경남대학교 교수는 "미국은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구체화된 자신의 구상을 (브런슨의) 지도를 통해 보여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며 "(핵잠 보유 등을 통한) 자주국방보다는 오히려 더 족쇄를 차고 미국에 종속되는 결과도 우려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