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영화의 러닝타임은 영화관을 나선 후에도 이어집니다. 때로 영화는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비로소 시작합니다. '영화관'은 영화 속 여러 의미와 메시지를 톺아보고, 영화관을 나선 관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스포일러 주의
시대를 놀라게 한 장준환 감독의 장편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가 기이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내는 거장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을 통해 재탄생했다. 란티모스 감독의 손을 거친 '부고니아'는 점잖은 듯 뒤틀린 광기로 믿음을 흔들며 가장 시기적절한 질문들을 던진다.
벌들은 사라지고, 지구는 병들고 있고, 인류는 고통받고 있다. 거대 바이오 기업의 물류센터 직원인 테디(제시 플레먼스)는 이 모든 것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외계인의 지구침공 계획 때문이고, 사장 미셸(엠마 스톤)이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굳게 믿는다.
오랜 준비 끝, 함께 사는 사촌 동생 돈(에이든 델비스)과 함께 결국 미셸을 납치하는 데 성공한 테디는 지하실에 미셸을 감금한 채 지구를 찾아온 이유와 앞으로의 음모를 캐묻는다. 테디는 자신은 외계인이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는 미셸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고 지구를 지키고자 한다.
원작 '지구를 지켜라!'는 때밀이 수건으로 발등의 피부를 정성껏 벗겨낸 뒤 물파스를 바르는 고문 신처럼 이른바 'B급 병맛'의 정서가 강했다. 그러나 물파스 대신 항히스타민 연고를 바르는 '부고니아'는 양복을 입은 채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는 테디처럼 제법 점잖아졌다. 그러나 점잖아졌다는 게 순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구를 지켜라!'와 '부고니아'를 아우르는 공통의 정서는 '광기'다. '부고니아'에는 은근하면서도 잔잔한 유머와 함께 광기가 영화 내내 필수 요소처럼 깔려있다. 그리고 이러한 어두운 유머와 광기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비틀고 뒤틀어버리는 '부고니아'를 관통하는 단어는 바로 '믿음'이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는 블랙 코미디이자 심리극이다. 이는 단순히 테디와 미셸 간의 심리전만이 아니다. '부고니아'는 테디와 미셸의 대화, 테디의 말들과 행동을 통해 관객과 심리전을 벌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테디의 믿음을 흔들고자 하고, 테디와 미셸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믿음을 흔들고자 한다. 동시에 현시대에 대한 믿음 역시 흔들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믿음을 흔드는 쉬운 방법은 '시각'이다. 계급사회와 빈부격차에 대한 비유이기도 한 테디와 미셸은 상반된 인물이다. 미셸은 타임지 등 유력 잡지의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성공한 거대 바이오 기업의 CEO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도시적이고 차가운 이미지의 미셸은 현대 사회가 동경하는 인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반면 미셸의 바이오 기업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 테디는 허름한 옷과 낡은 집에 살고, 미셸을 심문하기 위해 한껏 차려입은 정장조차도 변변치 못하다. 거기에 그는 음모론에 빠진 도태된 인물, 이른바 루저의 전형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광적인 음모론자로 보이는 테디와 반듯한 CEO로 보이는 미셸의 대화를 듣다 보면, 어느새 앞서 보여준 인상이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느껴지는 어긋남 등을 마주하며 누구를, 무엇을 믿어야 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하게 된다. 어쩌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을 느낄 수도 있다.
시각 이후는 이성적인 방식으로 믿음을 시험한다. 테디와 미셸의 대화와 그들의 생활 안에는 여러 가지 함정이 숨어 있다. 이상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대화 안에서 음모론만이 아니라 계급과 자본, 정치와 사회운동, 환경 등 지금 인류가 닥친 여러 모순과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건든다.
시대에 대한 풍자와 은유, 신랄한 비판이 뒤섞인 대화들은 중간중간 감독이 숨겨 놓은 함정으로 가득하고 이는 영화 내내 테디와 관객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한다. 과연 테디는 단순한 음모론자일까, 광기에 찬 비현실적인 인물일까. 미셸은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는 CEO일 뿐일까. 과연 기업이 옳은 걸까, 노동자가 옳은 걸까. 사회운동은 정말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 미셸은 정말 인간일까 아니면 외계인일까 등 말이다.
이러한 각자의 믿음과 시험은 각자의 방식을 배신당한다. 온건하게 쌓아 올렸던 광기, 이성적이고 차갑게 이어졌던 믿음은 엔딩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린다. 보이는 모습과 대화 뒤에 감독이 나열해 놓은 것들은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우리가 비틀린 세상에서 각자의 믿음을 가져가야 할지 찾아보길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충격적인 반전을 담은 '부고니아'의 결말은 원작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급진적인 사회운동과 정치를 비판했던 테디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인류에게 급진적인 엔딩이다. 임계치에 다다른 것처럼 보이는 인류와 지구가 직면할지 모르는 미래를 보며 우리가 과연 가깝든 멀든 미래에 무엇을 잃게 될지, 그리고 지구가 무엇을 얻게 될지 보여준다.
적어도 인류에게는 배드엔딩이지만, '부고니아'의 결말을 거친 지구는 아이러니하게 미래를 봤다. 영화는 꽃가루를 옮기는 벌의 모습으로 시작해 꽃가루를 옮기는 벌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시작이 끝이 되고, 끝이 다시 시작이 되는 순환의 엔딩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메리배드엔딩 같은 결말 직전까지도 벌떼가 왱왱거리는 것처럼 많은 대화가 관객들의 머리를 울리며 인간, 사회, 지구가 직면한 문제를 떠올리게 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지기 어렵게 만든다. 비틀림 속 숨겨진 것들을 찾는 것이 어쩌면 '부고니아'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영화 내내 테디는 비틀린 광기가 감돌지만, 최대한 '정상성' 안에 욱여넣고자 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테디는 마치 군집을 이뤄 비행하는 벌들의 소리처럼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왱왱거리는 비틀린 광기를 미셸과의 협상을 위해 참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제시 플레먼스가 너무나도 완벽하게 그려냈다.
삭발까지 감행한 엠마 스톤은 이번 작품에서도 빛난다. 광기에 찬 테디라는 특징적인 인물 앞에서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미셸은 그렇기에 어려운 인물이다. 이를 엠마 스톤이 균형감 있게 그려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인물은 테디의 사촌 동생 돈 역을 연기한 에이든 델비스다. 비틀린 세상과 인물들 사이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은 돈의 모습을 그려낸 에이든 델비스는 다음 행보가 무척 기다려지는 신인 배우다.
'부고니아'는 원작의 핵심을 가져오되 새로운 색깔의 영화로 재탄생했다. 웃기면서도 이상하고, 날카롭고 직설적이면서도 비틀린 '부고니아'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었기에 가능했다.
119분 상영, 11월 5일 개봉, 청소년 관람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