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이라니 '빨갱이' 된 가족들 침묵 강요"…'여순사건' 유족 한탄

연합뉴스

"'빨갱이' 된 남은 가족들 긴 세월 침묵 강요당했는데…"

최근 '여수·순천 10·19 사건'(이하 여순사건)을 두고 정치권에서 잡음이 일고 있는 가운데 유가족이 "여수 14연대를 논하기 전에 먼저 그 시대를 인식하고 직시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유족 2세인 이형용 지리산권역 역사문화연구소장은 3일 CBS노컷뉴스에 "여순사건이 여수 14연대의 '반란'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이 확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대한민국 최초의 계엄이 발생한 여순 사건에 대해 국가 차원의 객관적 사실 조사가 매우 부족하다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고 운을 뗐다.

그는 "사건 발생 7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오랜 세월 배운 대로 '여순반란사건'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다"며 "1945년 8월 15일 일제 해방 이후 각 지역의 지식인, 독립운동가, 농민대표 등 자발적으로 지방 자치 정부 '인민자치위원회'가 조직됐다"고 전했다.

이어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인민위원회를 좌익 조직으로 규정하고 해산을 명령했다. 이후 일제 관료와 경찰을 다시 기용하면서 인민위원회는 탄압 대상이 된 것"이라며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로 남북이 갈라지고 혼돈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1946년 대구 10월 항쟁, 1947년 제주 4·3 사건, 1948년 여순 10·19항쟁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순사건위원회와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해 초토화 작전에 나서려 했다. 하지만 여수 주둔 14연대가 진압 명을 거부하고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를 주장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후 대통령이 아닌 현지 사령관이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뒤늦게 국무회의를 통해 계엄령을 사후 승인했다. 진압군은 당시 민간인 반란으로 발표하며 협력자 색출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도 이어졌다.

연합뉴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여순사건 77주기를 맞아 "1948년 10월 19일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장병 2천여 명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 부당한 명령에 맞선 결과는 참혹했다"며 "다시는 국가 폭력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대통령으로서 엄중한 책임 의식을 갖고 이를 막기 위한 모든 조치를 다 할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이에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은 1948년 10월 31일 서울신문에 보도된 백범 김구 선생의 담화를 인용하며 "여순사건을 '테러'와 '반란'으로 규정한 바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와 관련 이 소장은 "김구 선생의 발언을 '반란'의 근거로 인용한 것은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사실의 일부를 떼어내어 (사건을) 잘 모르는 국민들을 호도하려는 의도"라며 "해방된 나라에서 다시금 일제 식민시대처럼 국민을 향해 총을 쏘는 일을 할 수 없다며 제 14연대 군인들은 '반란 아닌 반란'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진압군은 국민을 무수히 학살했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죽여도 되는 존재로 낙인찍었다"며 "여순사건은 우리 사회가 '역사의 본질'을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여순사건의 진실이 윤석열 정부의 위법한 '12·3 비상계엄'을 계기로 올바른 진실 규명의 길로 접어들 수 있게 됐다"며 "여순사건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과거사 속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도 국가가 올바르게 진실을 규명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천기사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