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간 진행된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대 경제포럼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이 경주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브리지, 비즈니스, 비욘드(연결과 성장, 그 너머)'를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는 역대 최대 규모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각국 정상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등 전 세계 기업인 17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행사 기간 내내 공급망, 인공지능(AI), 디지털 전환 등 핵심 의제를 논의하며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특히 이번 APEC 기간 중에는 공전했던 한미 관세 협상이 깜짝 타결되고, 글로벌 AI 칩 선두주자인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한국 기업들과 'AI 동맹'을 맺는 등 대형 이벤트들이 속출했다. 의장국인 한국이 APEC의 위상을 실질적인 글로벌 경제 협력의 장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나온 배경이다.
서밋 의장인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달 31일 폐막식에서 "이번 경주 CEO 서밋에서 글로벌 리더들이 한데 모여 연대와 협력, 혁신의 방향성을 함께 고민하며 해법을 마련했다"며 "APEC은 단순한 토론의 장이 아닌 실행과 행동의 플랫폼인 만큼, 향후 연계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경제의 회복력과 포용성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관-러트닉 '뜨거운 포옹'…한미 관세 협상, 서밋 현장을 뒤흔든 낭보
서밋 기간 초반 가장 주목받은 소식은 단연 한미 관세 협상 타결이었다. 양국은 대미 현금투자 비중 등 일부 쟁점을 두고 정상회담 직전까지도 의견을 좁히지 못했던 만큼, 회담을 앞둔 경주 현장에는 불확실성 속 긴장감이 감돌았다.트럼프 대통령은 지나달 29일 경주 도착 직후 APEC CEO 서밋 특별연설에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을 직접 언급하며 "굉장히 훌륭하면서도 터프한 협상가"라고 평가했다. 협상이 양측 모두에게 쉽지 않았음을 드러내면서도, 한국이 협상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한 대목이다.
이날 저녁, 미국 측 키맨인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주관한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이 열렸다. 한미 양국 정부와 4대 그룹 총수를 비롯한 주요 기업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산업 협력과 투자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행사 시작 전까지만 해도 관세 협상 결과가 나오지 않아 긴장된 분위기였지만, 진행 도중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현장은 금세 화기애애한 공기로 바뀌었다. 러트닉 장관이 김정관 장관을 포옹하는 장면이 포착돼 당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우리는 깐부"…삼성·현대·엔비디아, AI '치맥 동맹'의 밤
한미 협상 타결로 긴장감이 풀린 뒤, 서밋의 열기는 세계 거물급 기업인들의 회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AI 칩 시장의 거물,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30일 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회장과 가진 '치맥 회동'이 단연 화제였다. 'AI 동맹'의 출발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황 CEO는 회동에 앞서 "엔비디아와 한국은 함께 발표할 내용이 많고, 훌륭한 파트너들이 있다"며 "내일(31일) 우리가 함께 진행 중인 훌륭한 소식과 여러 프로젝트를 공개하겠다"고 예고했다.
세 사람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깐부치킨' 매장에서 만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식사를 함께했다. 서로 맥주잔을 부딪치며 치맥을 즐기고 기념사진을 찍는 등 마치 오래된 친구라는 뜻의 '깐부'처럼 어깨를 맞댔다. 자리에서는 '러브샷' 장면까지 연출됐다.
이른바 '깐부 회동'으로 회자된 이날 만남에서 황 CEO는 "'깐부'는 이런 자리에 딱 맞는 곳이라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회장과 황 CEO는 지난 8월 한미 정상회담 당시 미국에서 만났을 때처럼 다시 한 번 포옹했고, 황 CEO는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라며 유쾌하게 소감을 전했다.
입국 전부터 "한국에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고 예고했던 만큼, 황 CEO의 다음날 연설에 대한 기대감은 한층 고조됐다.
'GPU 26만 장 깜짝 발표' 공개한 젠슨 황…한국과 'AI 동맹'
황 CEO는 행사 폐막일인 31일 예고했던대로 특별한 발표로 산업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서밋 마지막 날 무대의 대미는 황 CEO가 장식했다. 황 CEO는 APEC CEO 서밋 특별연설에서 정부와 삼성전자·SK그룹·현대차그룹·네이버클라우드 등에 총 26만 장 규모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공급하겠다고 직접 말했다. 공급 규모만 약 10조~14조 원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로, 그대로 이행되면 한국은 AI의 두뇌 역할을 하는 GPU 칩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 칩은 현재 품귀현상이 빚어질 정도로 확보 경쟁이 치열하다.
황 CEO는 "지금이 한국에게 특히 기회가 될 시기"라며 "세계적으로 소프트웨어·제조·AI 세 가지 핵심 역량을 모두 갖춘 나라는 드물다. 한국은 그 세 가지를 모두 보유한 나라"라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의 학계와 스타트업, KAIST 같은 기관들과도 협력해 AI 생태계를 조성하겠다"고 덧붙였다.
연설에 앞서 황 CEO는 이재명 대통령을 만나 "e스포츠는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말로 운을 떼며, 엔비디아와 한국의 긴밀한 인연을 강조했다. 게임 그래픽카드 제조사로 출발한 엔비디아의 뿌리를 상기시키며 "한국은 깊은 기술력과 성공한 기업가들을 모두 갖춘 나라"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 전날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과의 '치맥 회동'을 언급하며 "다음에는 대통령님도 함께하시죠"라고 너스레를 떨어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황 CEO는 연설 직후엔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따로 만나기도 했다. 최 회장은 CEO 서밋의 주최 측으로서 공식 일정을 총괄하느라 '치맥 회동'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이재용 회장과 정의선 회장에게 건넸던 슈퍼컴퓨터 모형과 중국 백주(白酒)를 선물했고, 최 회장은 답례로 고대역폭메모리(HBM4) 웨이퍼 반도체를 건넸다.
이로써 황 CEO는 삼성전자, 현대차그룹, SK그룹 등 한국의 주요 산업 리더들을 잇따라 직접 만나며 AI 시대를 함께 이끌 '한·엔비디아 기술 동맹'의 틀을 사실상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