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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인구감소 벼랑 끝 '선택과 집중'이 불러온 日 도야마의 변화 ② 철강에서 문화도시로…9월이면 '린츠'가 들썩인다 (계속) |
9월 초, 오스트리아 북부의 도시 린츠가 들썩인다. 도시 전체가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페스티벌(Ars Electronica Festival)'의 무대가 되기 때문이다. 철강산업으로 성장했던 이 도시는 지금, 세계 미디어아트의 수도로 불리고 있다.
지하철역에서 내리자마자 빨간색 페스티벌 프리패스를 목에 건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도시 전체가 축제의 열기로 가득했다. 이 프리패스 하나면 대중교통도 무료다.
올해(9월 3~7일) 'PANIC yes/no'를 주제로 열린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페스티벌(Ars Electronica Festival) 은 379점의 작품이 전시됐고, 닷새간 12만 명이 방문했다.
주요 전시장은 과거 거대한 우편물 집하장으로 쓰였던 '포스트시티(PostCity)'였다. 1800㎡ 규모의 이 공간은 산업시설의 흔적을 간직한 채,예술·기술·사회가 교차하는 실험적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넓은 콘크리트 홀 안에서는 설치미술, 로봇 퍼포먼스, 미디어 인터랙션 작품이 동시에 펼쳐지며 린츠가 산업의 도시에서 예술과 기술의 중심지로 변모했음을 보여줬다.
굴뚝의 도시로 불리던 린츠의 변화는 단기간의 이벤트가 아니라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여정이었다.
'유럽 문화수도' 지정, 도시 구조를 바꾼 전략
린츠의 변화는 위기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철강산업이 침체되자 도시는 방향을 틀었다. 산업개발이 아닌, '예술·기술·사회'라는 새로운 도시 전략이었다. 1979년 첫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페스티벌이 그 시작이었고, 기술과 예술이 결합한 미디어아트가 나왔다.초기에는 "이건 예술이 아니다"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린츠는 예술이 기술을 해석하고 기술이 사회 변화를 촉발하는 구조를 구축했다. 1987년에는 디지털 예술을 정식 예술로 인정한 국제상 '프릭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Prix Ars Electronica)'를 제정하며 세계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모이는 거점이 됐다. 이 상을 통해 예술적 방식으로 기술을 사용하는 창작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했고, 페스티벌은 점차 글로벌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서울에서 파견 온 손혜림 큐레이터는 "아르스 일렉트로니카는 전 세계 미디어아트 트렌드를 가장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자리"라며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전역의 사람들이 기술을 바라보고 그 한계와 비판 지점을 자연스럽게 공론화할 수 있는 장이기 때문에 아티스트들이 오고 싶어 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굵직한 '프릭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와 같은 국제상이 있고, 젊은 작가들이 창의적인 생각을 꾸준히 발산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마련돼 있다는 점이 세계 각국의 아티스트들이 린츠로 몰리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페스티벌 현장을 찾은 한국인 유학생 한다빈 씨는 "이번이 첫 방문인데 미디어아트를 전공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축제"라며 "작품이 많고 주제도 매년 바뀌어 공부에 큰 자극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김아영 작가의 수상 이후 한국에서도 더 알려졌고, 새로운 작가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자리"라고 덧붙였다.
올해부터는 전남 광양시와 린츠시가 공동으로 한국과 오스트리아 작가를 동시에 지원하는 '광양·린츠 미디어아트 그랜트'를 신설했다. 프릭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이후 처음 생긴 국제 공동 어워드로, 양 도시가 미디어아트를 매개로 교류를 제도화한 사례다.
2009년 린츠가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되면서 변화는 제도적으로 확립됐다.
젤지코 말레세비치(Zeljko Malesevic) 린츠 시의원은 "당시 우리는 축구 유럽 챔피언십 유치와 문화수도 지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미래를 위한 결정으로 문화수도를 택했다"며 "과거에 없었던 문화적 측면이 추가된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이 배우고 실험하는 문화 시스템, 린츠의 경쟁력
'철강의 도시'가 '문화의 도시'라는 두 번째 얼굴을 갖게 되기까지 린츠는 45년이라는 시간을 묵묵히 걸어왔다. 그 변화는 단번에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린츠가 지금의 문화수도로 자리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도시는 페스티벌과 센터를 중심으로 시민이 직접 배우고 참여하는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다.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센터가 있었다.
센터는 △페스티벌 △센터 △퓨처랩 △솔루션 등 네 개 조직으로 운영된다. 페스티벌은 전시와 교류를, 센터는 시민 교육을, 퓨처랩은 연구개발(R&D)을, 솔루션은 민간 협력과 기술 이전을 맡는다. 이 네 축이 예술·기술·산업을 잇는 도시 생태계를 이룬다.
운영 방식도 행정 주도가 아닌 협력형 구조다. 린츠시가 100% 소유하지만 예산의 70%는 자체 수익으로 충당한다. 기업, 대학, 예술가, 시민이 연결돼 도시 전체가 하나의 '창의적 네트워크'로 작동한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센터는 단순히 기술을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다. 시민이 기술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춘다. 린츠는 예술과 기술이 결합한 '미디어아트'라는 개념을 시민이 먼저 이해하고 체험하도록 했다. 새로운 예술 형식을 시민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도시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통해 린츠의 문화는 예술을 '감상'하는 단계를 넘어 '직접 실험하고 학습하는 구조'로 자리 잡았다. 센터 실험실에서는 시민들이 전극을 달고 생각으로 로봇을 조종하거나, 바이오랩에서 생명공학 실험을 직접 경험한다.
센터는 학교와 긴밀히 협력해 교육 커리큘럼을 운영한다. 매년 약 3만 명의 학생이 센터를 방문하고, 연간 20만 명 이상의 시민이 실험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실업 청년과 경력단절 여성, 노년층을 위한 맞춤형 교육도 꾸준히 이어진다.
아르스일렉트로니카 센터에서 30년째 일하고 있는 게르프리트 슈토커(Gerfried Stocker) 공동대표 "센터는 시민이 기술을 실험하는 공간"이라며 "많은 시민이 이곳에서 처음 인터넷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처음부터 새로운 유형의 교육 기관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며 "지역 사회가 디지털 전환이라는 변화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핵심이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센터가 시민들에게 스며들기까지 최소 5년이 걸렸다"며 "변화가 도시에 자리 잡으려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크리스틀 바우어(Christl Baur) 아르스일렉트로니카 페스티벌 총감독은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1800㎡ 규모의 넓은 공간이 생기며 린츠가 하나의 플랫폼으로 성장했다고 느낀다"며 "많은 파트너와 협력하며 수많은 워크숍과 프로그램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전시 공간에서 만난 독일 예술가 슐롬 힐터하우스(Schlomm Hilterhaus)는 "기술이 인간의 정체성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성찰하게 된다"며 "단순히 더 빠른 도구나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를 고유하게 만드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르스 일렉트로니카가 점점 더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고 덧붙였다.
시골 학교에서 난민까지… 확장되는 문화교육
코로나19 이후 센터는 교육의 외연을 넓혔다. 도심 밖 학교와 마을을 직접 찾아가는 트럭을 운영하며 시골 학생들이 예술과 기술 실험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최근에는 난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화 워크숍도 진행 중이다.슈토커 공동대표는 "문화 교육은 사회 통합의 열쇠"라며 "기술 그 자체보다 사람들이 그 기술을 자신의 삶에 통합하도록 돕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린츠의 사례는 문화가 산업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시민 교육과 협력 시스템이 도시의 경쟁력을 새로 세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기적 성과보다 사람을 키우는 구조에 투자한 결과, 린츠는 '철강의 도시'를 넘어 지속 가능한 문화도시로 자리 잡았다.
* 본 보도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 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