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꼽히는 삼성 오승환(43)의 은퇴 경기를 위해 지난달 30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를 찾았습니다. 2005년 축구에서 야구로 담당이 바뀌어 처음 취재했던 한국 시리즈(KS) 최우수 선수(MVP)에 오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오승환. KBO 리그를 지배했던 돌직구를 베이징올림픽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등 국제 대회에서도 쌩쌩 뿌렸던 모습을 현장에서 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 오승환의 21년의 프로 생활을 마무리하는 은퇴식 기자 회견에서 21년 전 신인 때처럼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얼핏 들으면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진한 울림을 주는 발언이었습니다. 바로 클로저의 고충. 든든하게 팀 승리를 지키는 강철 심장만 있을 것 같은 오승환이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마음의 부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승환은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열린 '2025 신한 SOL 뱅크 KBO 리그' KIA와 홈 경기를 앞두고 진행된 은퇴식 기자 회견에서 마무리 투수의 평점심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마무리 투수로서 원망스러운 순간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평정심을 잃지 않고 동료 선수들을 다독일 수 있었나"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마무리 투수는 대부분 3점 차 이내 박빙의 승부처에서 등판합니다. 그런데 잘 던져도 수비 실책 등으로 승리가 날아가는 경우가 적잖게 발생합니다.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겠죠.
이 질문에 답은 간단했습니다. 오승환은 "그거는 쉬운 거 같다"고 짧게 말했습니다. 동료들을 탓하지 않고 대범하게 독려해왔던 돌부처다운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오승환은 상대 선수들에 대한 원망(?)을 언급했습니다. 오승환은 "내가 원망해야 할 (다른 팀) 선수들이 많은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떤 뒤 "나는 (상대) 선수들한테 한 번 맞을 때마다 타격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마무리의 마음 고생이 묻어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오승환은 KBO 리그 역대 최다 427세이브를 기록했습니다. 2위인 손승락 KIA 코치(271세이브)와 격차가 상당해 향후 어떤 선수가 오승환의 기록을 깰 수 있을지 모를 만큼 대단한 기록입니다. 또 오승환은 일본(80세이브), 미국 메이저 리그(44세이브)까지 한미일 통산 549세이브를 올렸습니다.(아쉽게 오승환은 1개를 채우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됐습니다.)
그런 오승환도 KBO 리그 통산 42번의 블론 세이브(BS)가 있었습니다. 2005년 오승환 데뷔 당시는 집계가 되지 않아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통산 33번의 패배도 있습니다.
마무리 투수가 맞으면 팀은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팀의 마지막 투수,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마무리 투수는 부담이 크고, 맞아서 팀 승리를 뺏기고 패배하면 심적 타격이 엄청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투수 최고의 마무리는 427번의 영광을 안았지만 어쩌면 그 이상 높은 강도의 아픔을 42번 이상이나 겪었던 겁니다.
오승환의 은퇴식 하루 뒤 한국 야구 역사에 남을 마무리 투수의 인터뷰가 절절하게 느껴지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대구가 아닌 인천 SSG 랜더스 필드에서였습니다. 오승환의 프로 입단 21년 전에 태어난 한화 마무리 김서현(21)이 겪은 상황이었습니다.
한화는 당시 9회초까지 5 대 2로 앞서 승리를 눈앞에 뒀습니다. 1위 LG가 이날 잠실 홈에서 5위 NC에 덜미를 잡히면서 우승 매직 넘버 1을 지우지 못한 상황. 한화는 이날 이기고 3일 kt와 수원 원정까지 승리하면 LG와 동률이 되면서 1위 결정전(타이 브레이커)을 치를 기회를 얻을 수 있던 터였습니다.
누구나 한화의 승리를 예상한 가운데 마무리 김서현이 등판했습니다. 세이브 2위(33개)의 출격에 3점 차 리드, 여기에 이미 3위를 확정한 SSG는 주전들을 뺀 상황이었습니다. 김서현은 채현우, 고명준을 내야 땅볼로 잡아 승리를 지켜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는 야구 격언이 또 들어맞는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김서현은 류호승에게 중전 안타를 맞은 뒤 현원회에게 슬라이더를 던졌다가 불의의 2점 홈런을 허용했습니다. 단숨에 1점 차로 쫓긴 김서현은 흔들린 듯 정준재를 스트레이트 볼넷로 내줬습니다.
한화 벤치는 팀의 마지막 투수인 김서현을 믿었습니다. 김서현으로서는 엄청난 부담감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반면 이날이 올 시즌 1군 6번째 경기였던 SSG 이율예는 부담이 없었습니다. 결국 김서현의 3구째 속구가 가운데 몰리면서 이율예가 끝내기 2점 홈런을 날렸습니다.
김서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타구를 바라봤고, 고개를 숙인 채 더그아웃으로 향했습니다. 5 대 6, 한화의 끝내기 패배. LG의 정규 시즌 우승이 확정되고, 한화의 1위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화 선수단과 팬들은 김서현을 '원망'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진부하지만 김서현이 없었다면 한화가 1위 싸움을 막판까지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즌 전 전력 평가에서 1위 도전은 예상할 수 없었던 한화를 이끈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한화는 올 시즌 전 마무리로 낙점한 주현상이 부진하면서 2023년 입단한 김서현을 클로저로 세웠습니다. 시즌 중 보직 변경이라는 쉽지 않은 환경에도 김서현은 전반기 42경기 22세이브(1승 1패 1홀드) 평균자책점(ERA) 1.55의 맹활약으로 한화의 1위를 이끌었습니다. 원투 펀치 코디 폰세, 라이언 와이스와 함께 한화 돌풍의 주역이었습니다. LG 염경엽 감독도 전반기 막판 이들이 중심을 이룬 한화 마운드에 대해 리그 최강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였습니다.
김서현은 후반기 주춤했지만 시즌 막판 다시 힘을 냈습니다. SSG전에 앞서 9월에만 1승 4세이브로 한화의 1위 경쟁을 견인했습니다. 바로 전날 롯데와 경기에서도 1이닝 무실점으로 승리를 따낸 김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규 리그 우승 도전을 위한 거의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김서현이 올 시즌 기록한 4번의 블론 세이브 중 아마도 가장 뼈아팠던 순간이었을 겁니다.
한화는 신축 구장 시대를 맞은 올해 반등을 다짐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평가를 받은 타선에도 막강한 투수진을 앞세워 전반기 1위에 오르는 등 예기지 못하게 우승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NC에서 베테랑 좌타자 손아섭을 데려오는 등 구단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빠르게 나섰습니다.
그러나 리그 정상급 전력을 갖춘 2023년 우승팀 LG에 끝내 한국 시리즈 직행 티켓을 내줘야 했습니다.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였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한화는 투수진은 물론 야수들까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면서 막판까지 가을 야구가 아닌 '무려' 1위 경쟁을 펼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고 아쉽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를 원망할 게 아니라 끝까지 우승 경쟁을 하는 쫄깃쫄깃한 즐거움을 원없이 안겨준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야 할 겁니다. 그래야 2018년 이후 7년 만에 진출한 가을 야구에서 김서현과 한화 선수들이 더 힘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암흑기에도 꺼지지 않았던 한화 '행복 야구'의 불꽃이 가을에 더욱 빛나기를 바라 봅니다.
P.S-오승환은 은퇴식 회견에서 "내가 원망해야 할 선수들이 많다. 맞을 때마다 타격이 크다"고 얘기한 뒤 "그럴 때면 (후배) 선수들이 '형은 그동안 많이 막았잖아'라고 얘기하더라"고도 말했습니다. 42번 이상 아픔을 느꼈지만 그 10배가 넘는 순간 기쁨을 누리기도 했던 겁니다.
그러면서 오승환은 "은퇴를 하는데 같이 생활하지 않았던 후배들까지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고생했다고 말해주는데 '내가 선수 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가는구나' 생각한다"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날 경기에서 오승환은 9회초 등판해 삼성 시절 절친했던 1년 후배 KIA 최형우와 대결한 뒤 진한 포옹을 나눴고, 마지막 공을 받은 포수 강민호는 선배의 영광스러운 퇴장을 뜨거운 눈물로 기렸습니다.
시속 150km 중후반대 강속구를 뿌리는 김서현은 어쩌면 오승환을 이을 한국 야구의 대표 마무리로 성장할지 모릅니다. 먼 훗날 김서현이 은퇴식에서 "형은 많이 막았잖아"라는 후배들의 원망(?)을 들으며 이날의 아픔을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S의 p.s-스포츠레터는 2021년 도쿄올림픽 이후 그동안 띄우지 않았습니다. 일이 많아졌다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고 있었는데 21년 전 야구 담당을 시작할 당시 신인이었던 오승환의 은퇴식을 취재하고, 기자 생활을 시작한 2004년 태어난 김서현의 아픔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자주는 아니더라도, 또 길고 지루해서 잘 읽히지 않더라도 가끔 레터를 띄워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