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런던 7·7 테러, 인도양 지진해일, 그렌펠타워 화재, 코로나19 팬데믹까지. 전 세계 굵직한 재난 현장을 20여 년간 지켜온 영국 재난 복구 전문가 루시 이스트호프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책 '먼지가 가라앉은 뒤'가 출간됐다.
이스트호프는 재난 직후부터 가장 오랫동안 현장에 머무는 사람이다. 그의 일은 단순히 잔해를 치우거나 시신을 수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가족에게 전달할 유류품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 애도 공간을 어떤 방식으로 마련할 것인지, 다시 닥칠 재난을 대비해 제도를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등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결정'들이 그의 손끝에서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 과정을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찢어진 바지에서 나온 영수증 하나, 종이 조각에 남겨진 구조 요청의 메모 하나가 유가족에게 건네졌을 때, 그것이 고통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그는 수없이 목격했다.
책에는 저자의 생생한 현장 기록과 더불어, 재난이 남긴 상처가 공동체와 개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7·7 테러 당시 유가족 지원센터가 수영장 딸린 건물에 마련돼 트라우마를 심화시킨 사례, 신원 확인 과정의 작은 오류가 평생의 의혹으로 남는 경우 등, 복구의 디테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한국 사회 또한 세월호 참사, 성수대교 붕괴, 이태원 참사 등 수많은 재난을 겪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복구'를 경험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스트호프의 증언은 추모와 애도를 넘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삶을 세우는 일이 공동체 전체의 과제임을 일깨운다.
이스트호프는 현재 더럼대학교 위기관리실천학과 교수이자 '애프터 디재스터 네트워크' 공동 창립자로 활동 중이다. 그는 "재난은 계속되겠지만 회복도 계속될 것"이라며, 반복되는 비극 속에서도 끝내 희망을 놓지 않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루시 이스트호프 지음 | 박다솜 옮김 | 창비 | 3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