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 '형법상 배임' 폐지 입장 확정…대체입법 추진키로

연내 경제형벌 규정 30% 개정 완료 목표…1차 110개 법 개정 과제 발표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0일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TF 당정협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정부와 여당이 경제형벌을 합리화하겠다며 '형법상 배임'죄를 완전히 폐지하겠다는 입법 방침을 확정했다. 다만 배임죄를 대신할 대체 입법을 동시에 추진할 계획이다.

아울러 개정할 경제형벌 규정 중 30%를 올해 안에 개정하겠다는 목표 아래, 1차로 110개 법 개정 과제도 함께 내놓았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30일 오전 당정협의회를 열어 이러한 내용을 담은 '경제형벌 합리화 1차 방안'을 발표했다.

당정은 과도한 경제형벌 규제가 기업의 창의적인 혁신을 저해하고, 단순한 실수나 규정를 숙지하지 못한 일만으로도 소상공인·자영업자 등 일반 국민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점을 감안해 이번 방안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7월 같은 취지로 경제형벌로 기업활동이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며 경제형벌 합리화 방안을 주문한 바 있다. 이후 정부와 여당이 각각 관련 TF를 운영해 입법과제를 검토한 결과, 이번 방안이 마련됐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30일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TF 당정협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우선 당정은 1년 내 경제형벌 규정 중 30%를 정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다만 이는 전체 경제형벌 규정이 아닌, 개정이 필요한 규정 중 30%를 연내 정비하겠다는 뜻이다. 기획재정부 담당자는 "이번 1차 110개 과제는 전체 6천여 개 경제형벌 규정의 1.6% 수준이지만, 실제 정비 합리화 여부를 검토해 대상이 확정되면 숫자가 달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개정 필요 여부를 가늠할 기준으로 ①책임주의 원칙에 비추어 형벌이 과도한지 ②시대변화로 형사 처벌이 불필요한지 ③행정제재 등 형벌 이외의 수단으로 법익 보호가 가능한지 ④다른 법률조항과 비교하여 형벌수준이 과도한지 ⑤해외사례와 비교해 형벌이 적정한지 등을 원칙으로 삼아 경제형벌 개정 여부를 검토했다고 밝혔다.

먼저 가장 논란이 됐던 형법상 배임죄에 대해서는 경영활동을 위축시킨다는 재계의 지적을 받아들여 완전 폐지하도록 기본방향을 정했다. 만약 배임죄가 폐지된다면 1953년 첫 제정 이후 7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형법에서 배임죄가 사라지게 된다.

정부는 최근 배임죄 판례 약 3300건을 분석한 결과, 배임죄의 구성요건이 모호하고 기업 뿐 아니라 민사상 영역까지 광범위하게 배임죄로 의율해 판결이 내려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행위가 배임에 해당하는지 예측하기 어려워 법 폐지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중요범죄를 처벌하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배임죄 요건을 명확히 하고 처벌범위를 축소하는 대체입법을 함께 마련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특별법을 통해 기존 배임죄의 주체·행위 요건을 구체화하거나 △각 개별법에 구체화된 배임행위를 규정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법무부 담당자는 "가장 큰 문제는 구성 요건이 노후화, 추상화돼 어떤 행위가 사후에 배임죄가 될 수 있는 지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라며 "따라서 배임죄 자체를 일단 폐지하되, 기업의 이익을 저해하는 등 범죄들에 대한 처벌 공백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동시에 대체 입법을 마련하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배임죄 폐지와 대체 입법을 마련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1차 방안의 110개 과제와 한꺼번에 제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현재 수사·재판 중인 배임죄 관련 사건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도 함께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상법상 특별 배임죄는 형법상 배임죄의 요건과 사실상 같아 실제 기소되는 사례가 거의 없다"며 "형법상 배임죄를 일단 해결한 후 검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와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0일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TF 당정협의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아울러 사업주에 대한 과도한 처벌로 기업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양벌규정을 폐지하거나 면책규정을 마련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대표적으로 상당한 주의·감독의무를 다한 사업주에 대한 면책규정이 없어 위헌판결을 받았던 최저임금법 규정에 처벌을 피할 수 있는 면책규정을 마련하기로 했다.

또 사업주를 겨냥한 징역·형벌 등 형사처벌을 대신해 기업을 대상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책임을 도입하거나, 과징금을 부과해 기업 차원의 위법행위를 억제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예컨데 그동안 선주상호보험조합 임원 등이 조합 이익을 부당하게 배당하면 최대 7년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해졌지만, 징역 상한선을 3년으로 줄이고 벌금형을 없애는 대신 손해액의 2배 이내에서 손해배상 책임을 묻도록 바꾼다.

또 배달로봇 등 실외이동로봇의 부품 등 경미한 사항을 사전 승인없이 개조한 경우 징역·벌금형이 규정됐지만, 아예 형벌을 폐지하는 대신 최대 5천만 원의 과징금을 물릴 계획이다.

아울러 중소기업·소상공인이 경미한 행정의무만 위반해도 형벌을 적용했던 규정에 대해서는 행정제재인 과태료를 매기는 방안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특히 38개 법률, 68개 경제형벌 규정이 여기에 포함돼 이번 110개 과제 중 가장 수가 많다.

미용실 등 공중위생영업 사업주가 상호명 등 변경신고를 제때 안했거나, 비료 포장지 제품명 등이 훼손된 경우처럼 가벼운 사안부터, 차량 렌트업자가 정비업자에게 알선수수료를 제공하고 대차서비스 고객을 끌어들이려 한 사례까지 형벌 대신 과태료를 활용할 방침이다.

또 즉시 형벌을 내리기보다 시정명령·원상복구명령 등 행정조치를 먼저 부과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에만 처벌하는 선(先)행정조치-후(後)형벌부과 방안도 9개 법률, 18개 규정에 걸쳐 마련했다.

페인트 제조업체 등이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을 운영하면서 정기검사를 받지 않았거나, 버스업체가 인가없이 노선 변경 등을 한 경우 등이 행정조치를 통해 먼저 개선할 기회를 제공할 사례로 꼽혔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30일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TF 당정협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이 외에도 다른 법과의 형평성 등을 감안해 형량을 낮추거나, 경제형벌을 계속 존치할 필요가 낮은 경우 형벌을 폐지하는 방안들도 10개 법률, 18개 규정에 제시됐다.

예를 들어 조리사·영양사 없이 100인 이상 대규모 급식시설 등을 운영할 경우 그간 징역 최대 3년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졌지만, 이를 징역 최대 1년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형량을 낮춘다. 또 은행이 고객의 외환거래가 합법적인지 확인하지 않은 경우에도 형벌을 폐지하고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날 발표한 개선안과 관련된 법 규정들을 일괄개정하기 위해 정기국회 회기 중 입법안을 제출하고, 다음 달 중 추가 개선방안을 마련,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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