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볼링 및 아시아 랭킹 1위에 빛나는 라피크 이스마일(말레이시아)이 국내 최고 권위의 DSD삼호 코리아컵 정상에 올랐다. 특히 결승 전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이기고 하늘에 계신 고인에게 눈물로 우승컵을 안겼다.
라피크는 26일 경기도 용인시 볼토피아에서 열린 '제27회 DSD삼호 코리아컵 국제오픈볼링대회' 결승에서 임승원(21기·팀 ACME)을 눌렀다. 256 대 224 완승으로 한국에서 처음 우승을 차지했다.
화려한 경력에 또 한번 영광을 더했다. 라피크는 2018년 세계선수권대회,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개인전 금메달을 따냈고, 2023년과 지난해 아시아선수권 2회 연속 4관왕의 위업을 이뤘다.
이날도 라피크는 강력한 왼손 샷으로 스트라이크 9개를 몰아치는 등 압도적인 기량을 뽐냈다. 결승에서 1~3프레임 스트라이크를 터뜨리며 3프레임 10번 핀을 놓친 임승원에 확실하게 기선 제압했다.
4프레임에서 9핀 커버로 숨을 고른 라피크는 이내 5프레임부터 스트라이크 행진을 펼치며 임승원을 여유 있게 제쳤다. 임승원은 막판 잇단 스트라이크로 추격했지만 초반 부진을 이기지 못하고 첫 우승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특히 라피크는 전날 예선 도중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를 들었다. 당뇨 등 지병이 있던 아버지가 끝내 숨을 거둔 것.
그럼에도 라피크는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우승이 거의 확정된 경기 막판 눈물을 훔치며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세리머니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기 후 라피크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슬펐다"면서 "그런 상황에서 이 대회에 출전한 걸 값지게 하기 위해, 나중에 아버지께 당당히 얘기할 수 있기에 좋은 모습 보여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이스마일이 아버지의 이름인데 이를 알리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선전했다"면서 "굉장히 중요한 대회였고, 아버지에 대한 최선의 노력이었다"고 강조했다.
당초 라피크는 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에 긴급히 귀국하려 했다. 그러나 비행 시간만 6시간이 걸리는 상황에 고국에 있던 형제들이 귀국을 만류했고, 라피크는 항공권을 취소하고 대회 출전을 준비했다.
라피크는 경기 후반 눈물과 세리머니에 대해 "아버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2번째 프레임 때 7번 핀이 아슬아슬하게 쓰러졌는데 아버지의 메시지 핀이라고 느꼈다"면서 "아버지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응원을 해준 아내와 2살 아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라피크는 "가족이 함께 오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가족 덕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이어 "가족이 있어 내 슬픔을 어루만져줄 수 있었다"면서 "아내가 '아버지가 아들을 자랑스러워 하실 것'이라고 위로해줬다"고 귀띔했다.
역설적이게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서 아들의 국제 대회 출전 기회가 늘어나게 됐다. 라피크는 "사실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그동안 미국프로볼링(PBA) 출전을 자제했는데 이제 늘리는 방향으로 내년 계획을 검토할 것"이라면서 "PBA에서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었는데 누구나 꿈꾸는 우승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한국에도 더 많이 방문할 생각이다. 라피크는 "2017년 도미노컵 때는 8강에서 떨어졌는데 2번째 참가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 기쁘다"면서 "한국을 워낙 좋아해 2018년 가족과 여행을 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어 "아내도 한국을 좋아해서 이번에 같이 왔다"고 덧붙였다.
우승 상금 6000만 원을 아내에게 줄 것이냐는 질문에 라피크는 폭소를 터뜨렸다. 이어 "세금을 떼고 받아야 하는데 '아내 세금'까지 떼야 할 것 같다"고 귀띔했다.
김언식 KPBA 회장은 이후 시상식에서 "라피크의 투구를 보니 스피드가 워낙 대단해 우승할 것 같다고 예언했는데 정확히 맞았다"고 기량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어 "DSD삼호 코리아컵 역사에 남을 스토리였는데 내년에도 좋은 경기를 펼쳐주면 좋겠다"고 덕담했다.
한·미·일 3개국 대표들이 대결을 펼친 이벤트 3인조 경기에서는 PBA 팀(토미 존스·프랑수아 라부아·그레이엄 파)이 9개의 스트라이크를 앞세워 235점으로 우승했다. 202점의 KPBA 팀(강희원·김고운·김형준)과 196점의 JPBA 팀(사이토 세이야·와다 히데카즈·아사토 슈사쿠)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