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만보산, 간토, 우즈베키스탄

 
연합뉴스

대림동, 명동, 건대양꼬치거리. 이른바 혐중시위대들이 최근 돌아다녔다는 장소들이다. 제 딴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 장소를 고른 모양이다. 중국인들이 가장 많은 장소는 중국일 텐데 중국에 건너가 "좀 데려가라"고 할 정도로 열성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미국까지 날아가 트럼프에게 부정선거를 읍소하는 이들에 비하면 안전한 곳에서 소수자를 괴롭히는 '방구석 여포'인 듯 하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지금은 소란을 벌이는 수준이지만 계기가 주어지면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에 왜곡된 정보가 입력되면 폭력의 분출은 삽시간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혐중 사례는 '만보산 사건'이다. 1931년 7월 경성과 평양, 인천, 개성, 원산 등에서 조선인이 중국인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공격으로 당시 중국인 사망자는 127명, 부상자는 393명으로 집계됐다. 사건의 원인은 조선일보의 한 기사에서 비롯됐다. 같은 해 4월 중국 만주 만보산이라는 곳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농지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고 그 결과 충돌이 발생해 다수의 조선인 사상자가 났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여기에 조선으로 들어온 중국 상인과 노동자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오래된 불만이 겹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폭력사태로 비화됐다. 문제는 당시 기사가 오보였다는 것이다. 중국인에 대한 해묵은 혐오에 오보가 불을 당기자 한꺼번에 폭발한 셈이었다.
 
 역사에서 이와 같은 사례는 수없이 반복된다. 우리가 피해자였던 적도 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 등 간토지역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다. 가옥 45만채 파괴, 사망자과 행방불명자는 10만 5명에 이르렀다. 지진 이후 조선인에 대한 대규모 살인이 벌어졌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일본 당국에 의해 유포됐고 군인과 경찰, 자경단에 의해 끔찍한 폭력이 자행됐다. 당시 조선인 희생자는 6600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에 왜곡된 정보가 더해져 일어난 야만적인 폭력이었다.
 
 반면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포용이 돋보이는 역사적 사례도 있다. 이를테면 1937년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의 간첩일 가능성이 있다며 연해주의 고려인 17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대숙청의 시대에 공포정치의 화신 스탈린의 지시를 거스를 수 있는 고려인은 없었다. 운이 없으면 강제이주가 아니라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총살형을 당하는 판이었다. 그 중 우즈베키스탄으로 쫓겨났던 고려인들의 구술을 기록한 '뜨락또르와 까츄사들'을 보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잘 곳도 없었던 고려인들을 따뜻하게 대해줘서 고마웠다는 고려인 1세대들의 증언이 나온다. 2014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조성된 '서울공원' 정문에는 "고려인들을 친구로 따뜻하게 맞아준 우즈베키스탄인들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는 글과 함께 빵을 주고 받고 악수를 나누는 우즈베키스탄인과 고려인들의 조각이 서있다.
 
연합뉴스

 소수에 대한 혐오와 폭력은 전염병과 같다. 방치하면 그 대상은 중국인을 넘어 다른 소수자에게로 확대될 것이다. 아마도 그 다음 표적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백인을 제외한 외국인과 여성, 노인, 장애인 등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혐오와 폭력은 시민사회의 자율적인 영역에만 맡겨서는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강력한 공권력과 제도로 제압하지 않으면 어느 새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될 것이다.

추천기사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