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펠레와 호나우딩요

브라질 축구 레전드로 보는 1972년과 2025년 대한민국

1972년 6월 펠레(가운데)가 서울윤동장에서 열린 친선경기를 마친 뒤 한국대표팀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맨 왼쪽에 당시 19세였던 차범근 선수가 보인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1972년 6월 2일 저녁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 지금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변한 한국 축구의 성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통로와 계단까지 빼곡히 메운 3만 명 넘는 관중이 내뿜는 열기는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이들 외에도 전국 곳곳에서 흑백TV와 라디오 앞에 모여든 축구팬들로 한국 전체가 거대한 흥분에 빠져 있었다. 한국인들은 단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브라질의 축구 황제 고(故) 펠레였다.
 
펠레는 21년간 선수 생활 동안 1281골(친선 경기 포함)로 최다 득점을 기록했고 축구 역사상 유일하게 FIFA 월드컵 우승컵을 세 차례(1958, 1962, 1970)나 들려 올렸다. 17세 나이로 1958년 스웨덴 월드컵 결승전에서 2골을 터뜨리며 혜성처럼 등장했고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최초의 전승 우승으로 정점을 찍었다. 축구계는 '축구 그 자체'가 되어버린 그에게 어떤 형용사도 부족해지자 '축구 황제'라는 최고의 칭호를 부여했다.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신화인 그 황제가 한국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2년 전 월드컵을 휘저었던 자일징요, 카를루스 등 소속팀 산투스의 스타 동료들과 함께 한국대표팀과 드림매치를 펼친 것이다. 3대2 산투스의 승리로 끝난 이날 경기는 한국 축구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펠레가 통산 1204번째 골로 '묘기를 보여달라'는 한국 팬들의 성원에 응답하자 동대문운동장은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여기에 한국 대표 공격수 이회택과 19세의 신성 차범근의 추격 골은 기름까지 부어버렸다.
 
해외 축구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한국인들에게 이 경기는 단순한 친선 경기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문화적 사건이었다. 김포공항과 산투스팀 숙소 주변은 환영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경기장에서는 모자, 손수건 등 펠레 굿즈와 펠레 기사를 실은 신문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세계 최강 브라질 축구와 황제를 알현(?)한 한국인들은 월드클래스 축구에 눈을 떴고 한국 축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 기대감은 폭발적으로 커졌다. 말 그대로 '펠레 현상'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1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5 넥슨 아이콘 매치에서 호나우지뉴가 드리블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로부터 53년이 지났다. 강산이 다섯 차례나 바뀐 뒤 펠레의 브라질 후배 레전드가 서울을 찾았다. 예측 불가능하고 독창적인 플레이로 '외계인'이라고 불리던 호나우딩요(호나우지뉴)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호돈신(호나우두), 히바우두 등과 함께 펠레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 전승 우승을 일궈낸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는 펠레와는 달리 은퇴한 상태로 팀 동료가 아닌, 선수 시절 함께 필드를 누비던 세계 각국의 축구 스타들과 경기에 나섰다. 경기장도 2만 5천여 석의 작은 운동장이 아니라 2002 한일월드컵을 치렀던 6만 6천여 석 규모의 서울월드컵경기장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반응은 반세기 전에 못지않았다. 지난 14일 21세기 세계 축구 레전드들이 출장한 아이콘매치의 티켓은 6만 4800여 장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전설들은 살이 찌고 배가 나온 중년의 아저씨들로 변신했지만 축구 팬들에게 그들은 여전히 그 시절 그대로였다. 호나우딩요의 삼바 드리블, 앙리의 우아함, 루니의 벼락슛, 카카의 감아차기, 카시야스의 철벽 방어, 캡틴 제라드의 위엄, 박지성의 심장 1.5개. 팬들은 경탄하고 환호하고 울고 웃었다.
 
전성기 시절 몸값이 총 1조 4천억원을 넘는 축구 레전드들을 한데 모은 아이콘매치는 국내 게임사인 넥슨이 지난해에 이어 개최했다. 펠레 방한 경기처럼 대한축구협회가 나선 일종의 국가행사가 아니라 기업 단독으로 주최한 것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눈길을 끈 점은 관중의 상당수가 10대였다는 것이다. 이들이 경기장에서 보여준 모습은 아빠 저리가라였다. 전설들에 대한 부모의 동경과 흠모가 어떻게 대물림될 수 있었을까? 2002년 월드컵 당시에는 엄마 뱃속은커녕 혈관 속 DNA로 미래의 아빠 또는 엄마를 찾아 헤매고 있었을텐데.
 
그 연결 고리는 게임이었다. 호나우딩요는 아버지에게 추억이지만 아들에게는 게임 속 현역이다. 온라인 축구 게임에서 전설들은 게임 캐릭터로 부활해 10대 청소년들과 함께 뛰고 있다. 경기장 앞 매장에는 유니폼 등 굿즈를 사려는 부자(父子) 또는 모녀(母女)들로 북적거렸다.
 
호나우딩요의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은 아빠와 아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유튜브로 과거 현역 시절 외계인의 플레이를 감상했다. 축구 레전드 앞에서 세대 갈등은 봄눈 녹듯 사라졌다. 아니 지역, 젠더의 간극도 지워졌다. 축구는 위대하다. 화합과 통합이 간절한 이즈음 축구와 전설들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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