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3일, 집권 후 다자외교 무대에 한 번도 서지 않은 '은둔의 지도자' 또는 '국제사회의 왕따' 이미지를 단번에 털어버렸다.
김 위원장은 이날 중국의 전승 80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 참관을 위해 26개국 정상들과 천안문 망루에 올랐다. 그것도 반미연대를 주도하는 시진핑 중국 주석의 바로 왼쪽에 자리했다.
시 주석의 오른 편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위치했으니 시 주석을 중심으로 북·중·러 3국 정상들이 나란히 서는 상징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이 장면 하나로 김 위원장은 '은둔의 독재자'에서 반미연대를 주도하는 주요국가의 정상으로 탈바꿈하는 이미지 자산을 얻게 됐다.
그 동안 국제외교 무대에서 정상적 외교활동을 해온, 그리고 이번에 천안문 망루에 함께 오른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 대표들은 북한의 갑작스런 변신에 당혹감을 느꼈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전승 80주년 열병식에서 김 위원장에게 주어진 위치는 지난 1959년 중국의 건국 10주년 국경절 열병식 때 할아버지 김일성에 주어진 자리보다 상석이다.
당시에는 마오쩌둥 중국 주석을 중심으로 왼쪽엔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 오른쪽엔 호찌민 초대 베트남 국가주석이 자리했다. 김일성 주석은 마오쩌둥 주석 기준 왼쪽에서 네 번째 자리에 위치했다
반면 김 위원장은 이번에 천안문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망루에서 시 주석 바로 왼편에 있었고, 천안문 광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는 시 주석과 펑리위안 여사 왼쪽 옆에 자리를 잡았다. 중국이 과거 김일성 주석 때보다 외교 의전에서 김 위원장을 더 배려한 셈이다.
이는 지난 2015년 같은 행사인 중국 전승 70주년 기념 열병식 때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 대한 중국의 외교 의전과도 비교된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천안문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시진핑 주석 왼편에 섰다. 시 주석 오른 편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과 똑같은 구도가 연출된 바 있다.
다만 천안문 망루에서는 시 주석의 오른쪽 바로 옆에 푸틴 대통령이 서고 그 다음에 박 전 대통령이 자리해 이번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시 주석 왼쪽으로는 중국 혁명의 원로들이 나란히 자리를 했기 때문에 이번 김정은에 대한 의전과 일률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북한의 최룡해 당 비서도 천안문 망루에 올랐는데, 박 전 대통령의 오른쪽 끝 부분에 위치해 사실상 조우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이번 우원식 국회의장에 대한 자리 배치도 푸틴 대통령의 오른쪽 끝으로 당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남북의 동선을 최대한 얽히지 않게 하려는 북한 또는 중국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우 의장은 열병식 전에 김 위원장과 악수를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김 위원장은 이번 행사에서 검은색 양복에 밝은 금색 넥타이를 착용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좀 더 짙은 황금색 상의를 입었다. 중국에서 금색은 복을 가져다준다는 의미가 있어 인민들이 좋아하는 색으로 알려진 만큼 중국에 대한 배려의 의미도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한중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며 "앞으로 조속한 시일 내에 한반도 평화통일을 어떻게 이루어나갈까에 대해 중국과 다양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라며 대중외교에 대한 자신감을 강하게 피력한 바 있다. 그러나 한중 관계는 2016년 사드배치 문제로 파국에 이르게 된다.
南이든 北이든 전략적 이익에 냉정히 반응하는 중국
김 위원장은 이번에 천안문 망루에 오르면서 러시아만이 아니라 다소 껄끄러웠던 중국과의 관계도 완전히 회복했다. 북·중·러 진영의 결속 속에 북한이 핵 무력을 보유하면서도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다양한 경제적·군사적·외교적 지원을 얻어 국가생존과 발전을 이어갈 수 있는 토대를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유엔 제재 속에서도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대규모 지원을 얻어내는 '핵보유국 인정'의 효과를 의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첫 다자외교무대에 딸 김주애를 대동해 데뷔시킴으로써 4대세습의 기틀도 강화하려는 것으로 관측된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천안문 망루에 오른 뒤 30여년 후 중국은 한국과 수교를 하는 선택을 했다. 천안문 망루에 오른 박 전 대통령은 미국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고, 중국과의 외교도 사드배치 문제와 한한령 등으로 파국을 맞이했다.
중국은 남한이든 북한이든 동북아의 지정학적·전략적 이익에 매우 냉혹하게 반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