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는 정상회담은 없다'는 말은 국제 외교에서 정설처럼 통했다. 양국 간 실무급에서 치밀한 준비와 조율을 거쳐 정상까지 올라가기 때문이다. 정상은 그저 꼭대기에서 만나 악수하고, 서명하고, 기념사진을 남기면 되는 자리였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엔 꼭 그렇지 않다.
트럼프 1기때는 '노딜'로 끝난 북미 하노이 회담이 대표적인 실패 사례였다. 2기 들어선 볼로디미르 젤렌스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등이 정상회담 자리에서 트럼프로부터 공개적인 모욕을 당했다.
다행히 이번 한미 정상회담이 이런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은 낮다. 한국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면박 주는 장면을 가장 반길 사람이 자신의 최대 라이벌 시진핑이라는 사실을 트럼프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번 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한국의 핵심 안보 이익을 공동성명에 반영해낸다면, 이번 회담은 트럼프 2.0 시대 성공적인 첫 한미 정상회담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핵심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미국의 핵 확장억제 공약 재확인이다. 확장억제란 미국의 동맹국이 적대국으로부터 핵 위협을 받을 때 '핵 보복' 등 미 본토 방위에 준하는 수준의 억제력을 제공한다는 약속이다. 한국은 재래식 전력만 놓고 보면 이미 북한을 압도한다. 그러나 고도화 하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앞에선 여전히 미국의 '핵 우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전임 바이든 대통령은 여러 차례 "북한의 한국에 대한 모든 핵 공격은 즉각적, 압도적, 결정적 대응에 직면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또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자체 핵 보유' 가능성을 언급하자, 바이든 정부는 확장억제 공약을 제도화하는 '워싱턴 선언'을 통해 한국의 독자 핵무장론에 사실상 족쇄를 채웠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거래적 관점에서 동맹을 상대하는 만큼 '크게 주고 한국의 자체 핵무장을 받아오자'고 호기롭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트럼프와 워싱턴을 모르는 소리다. 트럼프는 "미국이 공짜로 한국을 지켜주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핵 우산을 원해? 그럼 우산 값을 치러야지" 이것이 지금 트럼프와 워싱턴을 읽는 보다 정확한 해석이다. 따라서 이번 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지속적인 확장억제 제공'이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라는 점을 설득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성과가 될 것이다.
둘째,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을 계승한다'는 약속을 담아야 한다. 군사적 억제력만으로는 북한을 제어할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대북 억제력 강화에 올인했던 윤석열-바이든 시기, 북한은 핵 전력은 오히려 가장 강력해졌다. 게다가 한미가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방관하는 사이, 김정은은 푸틴과 손을 잡으며 전략적 공간을 더욱 확장했다.
트럼프 재집권 이후 '김정은-트럼프 회담 2.0'에 대한 기대와 추측이 무성하지만 아직 현실화된 것은 하나도 없다. 방향도 잡히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김정은과 잘 지내고 있다"며 재차 손을 내밀고 있지만, 북한은 '과거같은 비핵화 협상은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대북 확성기를 먼저 철거하며 관계 개선 신호를 보냈지만, 북한은 "한국은 외교 상대가 아니다"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핵심은 남북 및 북미 관계 개선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상호 신뢰를 구축하며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자는 데 있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일종의 프레임워크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초기에는 문재인 정부의 설득에 따라 한미 공동성명에 이를 명시한 바 있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 이번 한미 공동성명에서도 '북미 싱가포르 합의 지지'를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여기에 판문점 선언까지 함께 담긴다면,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한 한미 정상 간 의지와 협력을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는 곧 '트럼프-김정은 회담 2.0'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동시에 북한 문제에서 '한국 패싱'은 없을 것이라는 트럼프의 약속을 공식화하는 효과도 갖는다.
셋째, 대만해협 유사시 한국의 기존 입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대중국 견제 전략에서 한국의 적극적 동참을 요구하고 있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바로 대만해협 유사시 한국의 역할이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계자가 "중국과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인도·태평양 지역 동맹국들의 구체적 역할"을 언급하며 일본과 호주에 입장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 차례는 한국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 정부는 2021년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대만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처음으로 "대만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이라는 문구가 포함됐다. 일본은 한발 더 나아갔다. 미일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대만해협에서 무력이나 강압을 통한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에 반대한다"는 표현이 담겼다. 이는 곧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일본도 개입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도 이 '한 줄'을 더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전략적 환경은 다르다. 한국은 중국과의 경제·안보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중국에 대한 전략적 입장 변화를 수용할 국내적 공감대도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과의 비공개 협상장에서 대만 문제를 논의할 수는 있겠지만, 정상 공동성명에 선언적 문구를 포함해 스스로 전략적 공간을 좁힐 필요는 없다.
위 '세 가지'가 다소 원론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새로운 것이 없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기존 질서를 흔들고 새로운 판을 짜려는 트럼프 시대아닌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한미동맹의 디폴트값을 지켜내는 것이 오히려 성과가 될 수 있다. 불편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박형주 칼럼니스트
- 전 VOA 기자, 『트럼프 청구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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