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DJ-오부치'→21세기 '이재명-이시바'로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23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한일 확대정상회담에서 기념촬영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23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더할 나위 없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두 정상이 참석한 한일 정상회담은 이날 예상된 시간을 훌쩍 넘겨 진행됐다. 당초 5분 정도로 예상된 소인수 회담은 한시간 넘게 이어졌고, 6시 30분으로 예정돼 있었던 한일 공동 언론 발표도 지연됐다. 

이 대통령은 회담에서 양 정상이 한반도 비핵화 및 저출산·재난 안전 대응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심도 있고 허심탄회한 논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양국은 공동언론발표문을 통해 수차례 '미래지향적 협력'을 강조했다. 특히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한다는 내용을 담아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역시 간접적으로 언급됐다. 따라서 한일 관계 개선 흐름이 이번 정상회담 이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17년만의 '공동언론발표문' 채택…과거사 반성 내용 간접적으로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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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과 이시바 총리는 일본 도쿄 관저에서 정상회담 후 공동언론발표문을 채택했다. 한일 정상회담을 가진 뒤 합의된 문서의 형태로 결과를 발표한 것은 17년만이다. 앞서 지난 2008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방일 후 한일 정상의 공동언론 발표문을 채택한 바 있다.

양 정상은 협력을 위해 수시로 양국 정상이 오가며 소통하는 '셔틀외교'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이시바 총리는 한일 수교 60년 만에 취임 후 일본을 가장 먼저 방문한 한국 대통령은 이 대통령이 처음이라며, 이번 방일을 계기로 양국 교류를 발전시켜 나가길 희망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셔틀외교 재개가 '민주 대한민국'이 복귀한 뒤 한일외교가 조속히 정상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번 발표문에는 "이시바 총리는 1998년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회담에서 언급했다"는 문구가 담겼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알려진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은 양국이 미래지향적인 협력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된 선언으로 평가받는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에는 일본의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담겨 있다. 

이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는 내용이다.

앞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취지의 발언은 지난해 보수성향의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로부터 나온 적이 있다. 따라서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의 발언 역시 그 자체로는 기존 입장에서 크게 나아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공동언론 발표문의 톤 자체가 역대 정부와 차이가 크지는 않지만, '1998년의 역사인식'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며 역사인식을 포함한 의미의 '계승'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이 역대 정부와 차별화할 수 있는 의미있는 지점"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넘어서는 새로운 한일 관계에 대한 공동 선언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한반도 비핵화·경제·인적교류 등 다방면에 협력 강화 강조한 공동언론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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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정상은 이날 정상회담 후 △정상 간 교류 및 전략적 인식 공유 강화 △미래산업 분야 협력 확대 및 공동 과제 대응 △인적교류 확대 △한반도 평화와 북한 문제 협력 △역내 및 글로벌 협력 강화까지 5개 분야, 총 11개 항목이 담긴 공동언론발표문을 발표했다.

이 중 주목되는 부분은 이 대통령이 일본 정상과 만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는 점이다.

발표문에 따르면 양 정상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및 항구적 평화구축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하고, 대북정책에 있어 양국 간 협력을 지속해 나가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한미일 공조를 바탕으로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가 충실히 이행되도록 국제사회와 협력을 지속해 나가야 함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북한의 불법 사이버 활동이나 러북 간 군사협력의 심화에 대해 함께 대처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화와 외교를 통한 북한 핵·미사일 문제의 평화적 해결의 중요성도 강조했다"면서 "(북한의)납치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명시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한미일' 협력의 필요성을 언급함으로써, 곧 만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일·한미일 관계가 공고함을 강조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동북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경제나 안보 분야의 한미일 협력이 필수적인 까닭이다.

한일 양국은 미국의 일방적인 경제 압박 등 혼란스러운 국제정세 속에서 양국의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자는데도 합의했다.

발표문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흔들림없는 한일, 한미일 협력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에 공감하고, 한일관계 발전이 한미일 공조 강화로도 이어지는 선순환을 계속 만들어 나가자고 했다"고 명시했다.

이어 "양국이 중요한 협력 파트너라는 점을 재확인했으며, 오는 10월 한국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와 일본에서 열릴 한일중 정상회의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상호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담았다.

한 외교소식통은 "한일이 협력할 수 밖에 없는 국제 상황을 여지없이 보여준 회담이었다"고 평가하면서 "미국의 자국 이기주의 정책에 맞선 공동의 협력, 북한 문제를 둘러싼 공동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일관계를 공고히 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고 봤다.

경제·산업 분야에서도 양국이 서로의 강점을 바탕으로 협력해 나갈 때 더욱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 따라서 수소·인공지능(AI) 등 미래산업 분야 협력을 더욱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또 양국의 공통 과제인 저출산·고령화, 인구감소, 지방활성화, 수도권 인구집중 문제, 농업, 방재 등과 관련해서도 함께 대응해 나갈 필요성을 공감하고, 서로의 정책 경험을 공유하고 공동의 해결방안을 모색해 나가기 위한 당국간 협의체 출범에 의견을 같이 한다고 밝혔다.

과거사 둘러싼 국내 정서-日 정치적 상황은 변수


양국 정상은 "국제사회의 다양한 과제에 대해 파트너인 한·일 양국이 미래지향적이고, 상호호혜적인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함께 협력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고 했다. 한일 양국이 수차례 미래지향적 관계를 언급하고 나선만큼 향후 한일관계의 미래는 일단 '청신호'가 켜졌다.

다만 관건은 일본의 정치적 상황이다. 이시바 총리 퇴임 여부와 '일본인 퍼스트'를 강조하는 우익 성향의 참정당의 약진 등 일본의 정치 동향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시바 총리가 물러날 경우 차기 자민당 총재 후보로는 다카이치 사나에 의원과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날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과거사를 둘러싼 국내 여론 역시 변수가 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과거사와 미래지향적 관계 투트랙 대일 외교 전략이 일단 공감대를 얻고 있지만 일본 정치인 망언 등 과거사와 관련한 이슈가 불거질 경우 한일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나가기 어려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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