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을 맞아, 역사가 외면했던 사할린 한인들의 이야기가 소설로 되살아났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 이어 일제강점기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을 완결하는 이금이 작가의 신작 '슬픔의 틈새'가 출간됐다.
이금이는 1984년 데뷔 이후 40여 년 동안 청소년과 여성, 역사의 틈새에서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을 문학으로 불러낸 대표적인 작가다. 2018년 IBBY 아너리스트에 선정됐고, 202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글 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이번 작품은 9년에 걸친 집필 끝에 완성된 대작이다.
소설은 1943년, 주인공 단옥네 가족이 아버지를 만나러 남사할린(당시 가라후토·화태)으로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강제로 끌려간 아버지를 좇아 탄광촌으로 향한 여정은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일제 패망 후에도 조국은 이들을 데려오지 않았고, 소련은 귀국선을 막아섰다. 귀환을 기다리던 조선인들은 무국적자로 수십 년을 살아야 했다.
'슬픔의 틈새'는 이러한 집단의 비극을 한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 그려낸다. 단옥은 이름과 국적을 몇 번이나 바꾸며(단옥·타마코·올가 송) 사할린에서 한 세기를 살아간다. 일본인 친구 유키에와 맺은 연대, 여성들이 생계를 떠안아 버텨낸 공동체적 삶은 국가의 배신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삶의 기록으로 남는다.
작품은 특히 여성들의 삶에 주목한다. 남편을 잃거나 다친 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앞장선 치요, 단옥, 유키에의 이야기는 민족·국적을 넘어선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작가는 "슬픔 속에서도 기어이 삶을 이어간 여성들의 꿋꿋함이야말로 경이로운 것"이라며 이 작품을 "증언이자 경의"라 설명한다.
저자는 작품을 집필하기 위해 직접 사할린을 찾고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죽은 줄 알았던 태술이 사할린에서 살고 있었다"는 문장에서 출발한 집필 여정은 역사적 취재와 허구적 상상이 맞물려 완성됐다.
작품은 단순한 과거 회고가 아니라 오늘의 독자들에게 묻는다. 국가란 무엇이며, 뿌리란 무엇인가. 잊혀온 역사적 틈새를 메우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일이라는 점에서 '슬픔의 틈새'는 광복 80주년의 오늘 우리 가슴에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이금이 지음 | 사계절 | 4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