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정민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자유계약선수(FA) 최대어였던 임성진이 KB손해보험과 계약하면서 한국전력은 임성진의 보상 선수로 정민수를 선택했다. 정민수는 7년간 몸담았던 팀을 떠나게 된 것이다.
한국배구연맹(KOVO) 규정상 A그룹(연봉 2억5000만 원 이상) FA를 영입한 구단은 원소속팀에 보호선수(5명) 외 1명과 선수 연봉의 200%를 보상하거나 연봉 300%를 지불해야 한다.
KB손해보험은 임성진과 황택의, 나경복, 윤서진, 차영석 5명을 보호선수로 묶었고, 정민수는 보호선수 명단에 넣지 않았다. 그러자 한국전력은 정민수를 임성진의 보상선수로 선택했다.
정민수는 V리그 정상급 리베로다. 지난 2024-2025시즌 수비 종합 1위(세트당 4.47개), 디그 부문 2위(세트당 2.294개), 리시브 효율 4위(41.63%)에 오르며 KB손해보험의 정규리그 2위에 앞장섰다. 이 같은 활약에 힘입어 2018-2019시즌 이후 6년 만에 베스트 7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런 정민수가 보호선수로 묶이지 않은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반면 한국전력으로선 보상선수로 대어를 낚은 셈이다.
12일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한국전력 체육관에서 만난 정민수는 새 팀 적응에 한창이었다. 아직 새로운 유니폼이 어색하지만 신영석, 서재덕 등 선배들이 정민수의 적응을 돕고 있다.
정민수는 "형들이 많이 도와준다. 세심하게 챙겨주고 팀 스타일을 알려주고 있다"며 "아직 100% 적응된 건 아니지만, 고참답게 잘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주장인 서재덕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정민수는 "재덕이 형에게 배우는 게 많다. 나도 나름 고참 역할을 많이 했는데, 재덕이 형처럼 솔선수범하는 선배가 위에 있어서 든든하다"며 씨익 웃었다.
이적 발표 당시를 떠올리면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다. 여행 중 기사를 통해 접한 소식에 휴가의 설렘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또 하필이면 KB손해보험 구단이 마련한 팬과 함께 떠난 여행이라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정민수는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당연히 팀에 남을 줄 알았다"며 "서운함과 미안함이 공존하면서도 다시 화가 났다. 머리가 복잡해서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 털어놨다. 이어 "팬들과 함께 간 여행이라서 끝까지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절친한 후배 나경복이 가장 슬퍼했다. 정민수는 "경복이가 우리카드를 떠나 KB손해보험으로 이적한 건 날 보고 왔다고 생각한다. 돈보다 정과 신뢰를 선택한 것"이라며 "경복이한테 미안한 게 많다. 서로 힘든 시간을 이겨낸 사이인데 1년밖에 함께 하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어 "둘 다 우승을 한 번도 못 해봐서 KB손해보험에서 함께 하자고 했다. 비록 내가 한국전력으로 가면서 무산됐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나고 싶다"며 "아직 배구할 날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어디서든 함께 뛰고 싶다"고 말했다.
정민수는 나경복에게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묵묵히 이겨내는 선수가 되길 바란다"며 "앞으로 더 잘 됐으면 좋겠고, KB손해보험의 우승을 이끌어주면 좋겠다"고 응원했다.
프로답게 빠르게 마음을 추스린 정민수는 곧바로 권영민 한국전력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감독님께서 내가 와야 한국전력이 좋아진다고 하시더라.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큰 힘이 됐다"며 미소 지었다.
상대 선수로 만났던 정민수를 '얄미운 선수'라고 표현한 권 감독은 "(정민수가) 보호선수로 묶일 거로 생각했는데, 안 묶인 걸 봤을 때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너무 잘해서 얄미웠는데, 우리 팀에 와서 너무 기쁘다"며 "정민수는 에너지가 넘치는 긍정적인 선수"라고 칭찬했다.
정민수 역시 상대팀으로 맞붙었던 한국전력에 대해 "조직력이 탄탄한 팀이었다. 지난 시즌에는 외국인 선수 없이도 많은 점수를 따냈다"며 "들어와서 보니까 왜 강한지 알겠더라. 운동할 때 끈끈함이 느껴졌다"고 평가했다.
권 감독은 정민수의 합류로 새 시즌 구상이 한결 수월해졌다. 리시브 라인을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어 아웃사이드 운용 폭이 넓어진 것. 실제로 새 시즌에는 아포짓 스파이커 에디를 아웃사이드 히터로 활용하는 방안도 염두에 두고 있다.
새 동료들도 정민수의 합류를 환영했다. 특히 KB손해보험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정호가 정민수를 격하게 반겼다. 정민수도 "정호가 많이 좋아하더라. 자기만의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선수라서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뻐했다.
정민수는 지난 시즌 V리그 시상식에서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나타났다. KB손해보험의 상징 색깔인 노란색에 맞춰 물들인 것이다. 여전히 노란 머리를 찰랑이는 그는 곧 한국전력의 상징 색깔인 빨간색으로 머리를 염색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에 정민수는 "말하고 나서 아차 했다. 빨간 머리로 염색하는 게 쉽지 않더라"면서 "미용실 디자이너와 얘기하며 예쁜 빨간색을 찾고 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면서도 "굳은 의지만 보여줄 수 있다면 여전히 염색할 의향은 있다"며 웃었다.
새 팀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만큼 각오가 남다르다. 정민수는 "한국전력은 무조건 플레이오프에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시즌 베스트 7을 수상했지만, KB손해보험에 있을 때보다 더 잘해야 한다"며 "한국전력에서 더 자랑스러운 선수, 모범적인 선수가 됐다는 말을 듣고 싶다"며 이를 악물었다.
생애 첫 우승을 향한 의지도 불태운 정민수는 "그 언덕에 올라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겠더라. 경험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올라가는 힘이 부족했다"며 "그 고비를 넘으려고 최선을 다하면 올라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나부터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친정팀 KB손해보험과의 승부에선 지고 싶지 않다는 정민수는 사실상 자신과 트레이드된 상대인 임성진을 언급하며 "성진이도 지고 싶지 않겠지만, 승부욕은 내가 더 강하다"면서 "첫 경기를 의정부에서 하는데, KB손해보험 팬들 앞에서 한국전력이 이기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