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마시라" 수습나섰지만…농산물 시장 개방 잔혹사

평택항에 쌓여 있는 컨테이너. 연합뉴스

대미 관세 협상은 타결된 뒤에도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문서가 공개되지 않으면서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농산물 시장 개방 여부을 둘러싼 의심의 시선이 짙어지고 있다.

정부는 "(쌀·소고기 개방에 대한) 재론은 없다. 검역 과정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미국산 과채류 수입 현실화는 시간 문제라는 반응도 없지 않다. 농민들의 반발이 본격화하면 정권에 직격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협력 강화"라는 수사적인 표현을 쓰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

美 과채류,  지금은 검역 2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11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정부는 미국산 과채류 수입 검역을 전담하는 데스크를 만들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 김정관 장관 지난 6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한국은 협상 과정에서 미국산 과채류 수입위생절차에 관련 양국 협력 강화와 미국산 자동차 안전기준 수용을 약속했다"며 "농산물 관련 비관세 조치도 점검하여 자체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 측 입장에서 봤을 때는 검역 관련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협력을 강화하자는 취지에서 저희가 데스크를 (운영)한다는 말씀을 분명히 드린다"고 덧붙였다.

이를 두고 야권을 중심으로 "검역 간소화 아니냐"는 평가가 나왔지만 김 장관은 재차 "절차대로 진행하는 것", "오해는 안 하셨으면 좋겠다"라고 답했다.
2025. 8. 6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 中
국민의힘 강승규 의원: 이번의 절차 수입 협상을 통해서 뭔가 절차를 간소화해 가지고 수입이 확대되는 것 아니에요? 말장난을 하면 안 됩니다.

김정관 장관: 예, 절차는 절차대로 진행을 하는 겁니다.

강승규 의원: 앞으로 그러면 미국산 소고기, 사과가 수입이 안 됩니까?

김정관 장관: 지금 현재도 미국산 사과는 수입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강승규 의원: 사과는 검역이 안 돼서 40년 동안 수입이 안 되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협상을 통해서 절차를 간소화하든지 뭐든지 해 가지고 사과를 수입한다는 것 아닙니까? 국민들을 속이면 안 되지요. 그러면 농민들이 사과 농사를 하고 있는데 미국 사과가 수입되는 것에 대비해 생산량을 줄여야 돼, 내가 전업을 해야 되는지 판단해야 되잖아요. 그래요, 안 그래요.

김정관 장관: 예, 위원님.

강승규 의원: (미국산 과채류를 위한) 별도 데스크를 만든다면서요?

김정관 장관: (검역) 8단계 절차가 잘 정상적으로 진행이 되면 수입이 되는 거지요. 사과 같은 경우는…
 

검역 관련 협력? 美사과에 '매직 패스' 줄까

스마트이미지 제공

현재 국내 검역 과정은 수입 신고 및 수입위험분석 절차 착수→병해충 위험평가→위험관리를 중심으로 총 8단계로 구성돼 있다. 미국산 과채류는 1993년 WTO 체제 이래 2단계 수입위험분석 절차 착수에 머물러 있다.
 
김 장관과 정부 측 설명을 종합하면 검역 단계를 간소화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이번 한미 관세 협상을 계기로  정부가 2단계에서 멈춰있던 미국산 과채류 검역 과정을 가속화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현장에서는 테마파크나 유명 미술관 등에서 줄을 서지 않고 빨리 입장할 수 있는 '매직패스'를 판매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미국에선 국내 검역 과정에서 사과를 우선 순위로 검사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가격 경쟁력이 생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후문이다. 미국이 사과를 적극적으로 한국에 수출하고 싶어한다는 것.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같은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절차적인 부분을 합리화하겠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미국 측에서 검역 과정에서 인공지능(AI) 등을 활용해 과학화·합리화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농업계가 "협력을 강화한다"는 정부 발언을 '20년 넘게 멈춰서 있던 과채류 검역 과정을 재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런 이유다. 멈춰있던 미국산 과채류 검역이 재개되고 검역 기간이 단축되면 사실상 추가 개방되는 효과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출신인 서진교 GS&J 인스티튜트 원장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전담 데스크를 따로 만든다는 것은 전담 인력을 붙인다는 것이기 때문에 (검역 과정이) 상당히 빨라질 수 있다"며 "당장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시일 내 검역이 완료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모든 정권에 '비수' 된 농민 반발…李정부도 의식할 수밖에

몇 년 내 미국산 사과가 국내 시장에 풀릴 것이라는 농업계의 우려에 대해 정부가 극구 손사레 치는 것은 농민들의 반발이 정권을 직격 했던 전례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정부가 농업 시장 개방 관련 협상을 할 때마다 농업계의 반발은 극심했고, 이런 반발은 국정 운영 동력 상실로 이어졌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1994년 WTO(세계무역기구) 출범 과정에서 농산물 시장 빗장을 일부 풀었고, WTO 체제 출범 뒤 협정에 따라 200개 넘는 농산물에 대해 수입을 허용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국회 진입을 시도했고 전국농민대회도 열렸다. 정부는 농민들의 반발을 가라앉히기 위해 총리를 경질했지만, 시위는 대학가로 번졌고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도 농·축산물 시장 개방 추진 과정에서 된서리를 피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는 전임 정부부터 이어진 쌀 시장 개방에 마침표를 찍으려다 농민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당시 정부는 칠레를 시작으로 싱가포르, 유럽연합, 미국과 잇따라 협상에 나섰다. 쌀, 소고기, 돼지고기 등 주요 품목이 FTA 협상 대상에 포함되면서 일부 농민들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정도로 반발이 거셌다.

이에 정부는 고율 관세를 설정하고 직불금을 증액하는 등 '달래기'에 나섰지만 한 번 꺾인 정권 지지율은 하락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4년초 탄핵 역풍으로 반등했던 지지율은 농민 반발로 심화된 사회적 갈등, 부동산 정책 실패, 당내 분열 등 여러 악재가 맞물리며 20%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농민 반발이 전 국민적 시위로 이어지면서 정권의 명운을 가른 사례로 꼽힌다. 이명박 정부가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하겠다고 하자 광우병 논란이 터지면서 대규모 촛불시위가 이어졌다. 당시 촛불시위 현장 사진은 최근 이뤄진 한미 관세 협상에서 소고기 월령 제한을 없애려는 미국 측을 한국 정부가 설득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될 만큼 매서웠다.

이재명 정부가 당초 예상과 달리 쌀·소고기 사수에 사력을 다했던 것은 이런 전례를 감안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 금지를 풀고 다른 것을 챙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없지 않았지만, '국익을 사수했다'는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사수하려 했다는 후문이다.
 
이를 두고 익명을 원한 한 통상 전문가는 "내어줄 수 있는 것은 내어주고 다른 실익을 챙길 수도 있었을 텐데 (농산물을 지키기 위해) 팔목이 제대로 비틀린 것 아니냐"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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