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은 불던 바람이 막 그친 연못 같다. 수업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교탁 위에 놓인 종이컵에서 아늑한 김이 올라오고 있다. 녹차를 마시도록 마음 쓰는 학생은 맨 앞줄에 앉아 있다.
1학년 신입생인데 헤어 스타일과 옷매무새가 가다듬어졌지만 소녀 티가 난다. 그 여학생이 강의가 시작되기 전 녹차가 담긴 종이컵을 교탁에 올려놓는다. 3월 초순의 따뜻한 녹차다. 늘 웃는 얼굴이 인상적인 학생은 강의가 시작되면 집중해서 듣고 때때로 큰소리로 질문도 한다.
그 여학생이 3주째 결석을 했다. 독감에 걸렸겠거니 했다.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할 때였다. 휴학했으면 학과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을 텐데…… 갖가지 소문이 부풀리던 어느 날 소식을 들었다. 교수는 학생의 카톡을 열어 보았다. 긴 머리카락에 하얀 치아가 드러나 보이는 프로필 사진을 보다가 울뻔했다. 사진 아래 문구가 교수의 심장을 두드렸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교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올린다. 타인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듯. 건너편에 앉아 있는 의사가 교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
"시편 18장에 나오는 시인데…… 지금도 모르겠어요. 부모라고 알까요? 먹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광선 아시죠?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양가적인 암시랄까요. 몹시 혼란스러웠어요.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날 그 여학생이 진료를 받았다네요. 정기적으로 받아온 건데…… 그날이었어요. 의사가 며칠 입원하라고 했는데 괜찮다면서 돌아갔데요. 약봉지만 들고요. 처방해 준 약을 먹은 건지는 모르겠어요. 약을 먹었더라면……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죠."
이야기를 듣던 의사는 진료실 책상 옆에 걸려 있는 그림으로 눈길을 돌린다.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다. 절망과 희망은 둘이지만 실은 하나라는 은유다. 그래서 장엄하고 신비하다.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의사가 입을 연다.
"그날 밤 뛰어 내렸어요. 12층에서요. 새벽에 전화를 받았어요. 학생의 엄마는 흐느끼지도 않았어요. 참혹함이 너무 크면 감정이 따라가지 못해요. 그때부터 제 입이 썼어요. 커피도 생수도 사과도 빵도, 먹고 마실 수 없었어요."
"낌새를 알아챌 수 없었나 보군요?"
"낌새가 보인다고 억지로 잡아둘 수 없잖아요. 인간이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도무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할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기도뿐이에요.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이거나, 부탁한다는 기도…… 둘 중 하나예요. 선택은 의사가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교수는 진료실이 답답하다. 에어컨이 작동되고 있지만 습도가 높아 몸이 끈적거린다. 의사의 등 너머 작은 창문은 섭씨 36도로 달구어진 오후의 햇빛이 투과 중이다. 창틀 아래 놓인 화분 속 유칼립투스의 동전 같은 이파리는 시들어 있다. 의사가 그제야 교수의 안부를 묻는다.
"잘 지내셨죠? 오랜만에 오셨네요"
두 사람이 마주하는 것이 여섯 달 만이다.
"벌써 그렇게 됐네요. 지옥에서 보낸 한철 같았어요. 암에 걸려서…… 언제 끝날지, 끝낼 수는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의사가 보니 교수의 몸이 여섯 달 전과는 달리 형편없이 말랐다. 얼굴은 반쪽이다. 체중이 15kg이나 줄었다고 했다. 교수의 주치의인 의사는 그런데도 태연하다. 위로의 말조차도 없다.
"저는 방광암인데 3개월마다 긁어내고 있어요. 3년째 이러고 있어요. 삶의 질이 개판이 되는 거죠. 그래도 받아들여야지요. 감사해야지요."
교수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의사가 암에 걸려 투병 중이라는 것을 그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의사 앞에서 자기연민을 들켰다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을 찡그린다. 교수가 묻는다.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는 건가요? 지난봄에 사라진 여학생에 비해 그렇다는 건가요?"
의사는 조금 여유를 가지려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댄다. 잠시 뒤 차분하게 입을 연다. 마음의 병은 누가 치유해 줄 수 없다는 것. 스스로 절대자를 사랑한다 해도 그의 은총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우리는 다행히 살아남기로 마음의 방향을 잡은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리고 자조하듯 덧붙인다.
"안전한 감옥을 만들었잖아요."
정신과 의사는 차분하고 냉정하다. 자기 방광을 사랑하는 암세포를 대하듯. 3개월마다 긁어내야 하는 방광의 암 덩어리를 증오하듯.
"똑같이 처방하면 되겠지요?"
의사가 교수에게 묻는다.
"뇌종양 수술 후 먹는 횟수가 줄어들었어요. 사람 만나는 일이 줄었으니까……"
"불안과 두려움을 인간이 어쩌겠어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도 있잖아요? 그 양반이 '가시'라고 했잖아요? 행운의 가시!"
진료실은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시원해졌다. 벽에 걸린 시계 바늘이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다. 두 사람은 일어나 악수를 한다. 교수는 아마 몇 달 후 그 여학생이 그랬듯이 약을 받으러 다시 올 것이다. 교수가 진료실 문을 닫으려는데 등 뒤에서 의사가 묻는다.
"그 여학생의 선택이 교수님께는 어떤 자극을 주었나요? 아니, 자극이 되었나요?"
교수는 멈칫 제자리에 선다. 3월의 교탁 위에 놓인, 녹차가 담긴 따뜻한 종이컵 앞에 설 때처럼. 잠시 서 있던 그가 조용히 진료실 문을 닫고 미지수의 오후 속으로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