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20년 집권설'이 여론 역풍을 맞던 시절이 있었다. 탄핵을 계기로 들어선 문재인정부의 초기 지지율이 80%대로 하늘을 찔렀을 때인데도 그랬다. 그만큼 보수정당의 연패(連敗)를 당연시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10년 가까이 흐른 현재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국민의힘 안팎에선 지난해 총선부터 올해 대선까지 연이은 패배를 심상치 않은 전조로 본다. 22대 총선에서 치열한 접전을 치른 조정훈 의원(재선·서울 마포구갑) 역시 '이유 있는 걱정' 중이다. 수권정당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여당을 견제하려고 우리 당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 악물고 견뎌서, 다시 이기는 방법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8월 1일 출간을 앞둔 <이기는 보수>(더레드캠프)가 탄생한 배경이다. 과거 세계은행(WB)에서 15년간 일한 조 의원은 스스로를 '굴러들어온 돌'이라 칭한다. 제3지대 정당인 '시대전환'을 이끌다가, 2023년 국민의힘에 합류한 이력 탓이다. 경제전문가이자 '전략통'으로 통하는 조 의원은 당 총선백서특별위원회 위원장, 전략기획특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지난달 3일 대선 개표방송을 보며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는 그를 이달 25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났다. 1997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DJ(김대중 前대통령)에게 진 제15대 대선부터 올해 제21대 대선에 이르기까지 '28년 선거사(史)'를 샅샅이 복기한 그는 "지는 게 습관이 되면 안 된다"고 했다. 조 의원과의 일문일답.
Q. 책 제목이 심플하면서도 인상적이다.
A: "정치란 업(業)의 본질은 '결과책임'이다. 특히 선거는 모든 걸 걸고 국민들의 심판과 결정을 받음으로써 '이기는 분량'만큼 권력이 주어진다. 그 힘으로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다. 우리 당은 1997년 이후 승률을 놓쳤다. 대선도 총선도, '3승 4패'다. 공교롭게도 지는 경험이 이기는 경험보다 많아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년 지방선거의 목표도 달라졌다. 17개 시·도 중 7~8곳만 이겨도 '선전'이라고 보는 것이다. 진짜 보수우파 정치가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원칙이 맞다면, 다시 이기는 방법을 생각해내야 된다. 이기지 않으면 '원내 사회운동'과 다를 게 뭔가."
Q. '이기는 보수'가 되려면 다음 총선에서 몇 석을 얻어야 하나.
A: "당연히 과반이다. (기자를 보며) '그게 과연 될까' 싶을 텐데, 이해한다. 총선 목표가 150석을 넘기는 것이라고 하면 다들 웃는다. 스스로를 못 믿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게 문제다."
Q. 작년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얻은 수도권 의석이 121석 중 19석인 점은 새삼 충격적이다. 지적했듯 '전국 정당'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A: "경기는 6석으로 '10분의 1'이다. 많이 뼈아프다. 솔직히 집값이 오른 게 저희 (윤석열)정부의 책임은 아니다. 문 정부 탓인데, 그 맥락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고,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질 수밖에 없었다."
Q. 그래서 쓰게 된 책인데, 집필 과정은 어땠나.
A: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작년 총선 백서 이후부터다. 꽤 욕심 낸 직책인데, '해부는 하고 봉합이 안 된 채' 수술실을 떠났다. 이건 구조적 문제라는 직감이 들더라. 틈 나는 대로 공부했다. (2004년 '박근혜 비대위' 때) 천막당사 시절이 특히 궁금했다. 당시 당직자들과 언론인들도 많이 만났다. 사무총장이었던 고(故) 이상득 전 의원을 뵙지 못한 게 제일 아쉽다. 박 전 대통령은 책이 발간되면 찾아 뵐 생각이다. 천막당사에 비춰 저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여쭤보고 싶다. 현 시점의 비대위원장이셨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도…. 그 때만큼 우리가 더 잘 반성하고, 반등해 본 적이 없으니까."
Q. 6·3 대선의 결정적 패인은?
A: "첫째는 '도덕성' 문제다. 계엄으로 법치가 크게 훼손됐다. 둘째로, 메시지가 허접했다. MB(이명박 前대통령)의 '747'(7% 성장·4만 달러 소득·G7 진입), 박 전 대통령의 '경제민주화'처럼 기억나는 슬로건이 없다. 세 번째가 '계파 갈등'이다. 민주당은 승리를 위해 이 악물고 역할 분담하는데 우리는 뭉치지 못했다. 그랬다면 그 힘으로 이준석(개혁신당 전 후보)과 단일화도 했겠지. 싸울 의지가 사라질 정도로 분열했다. 이 3가지는 우리가 질 때마다 나타난 패턴이다. 신속하고 단호하게, 그리고 뿌리부터 고쳐야 한다."
Q. 최근 당 상황을 두고 '백가쟁명(百家爭鳴)', '자중지란(自中之亂)'이라고들 한다.
A: "뚜렷한 '미래권력'이 없어서 그렇다. 예전처럼 어느 줄에 서느냐에 따라 정치적 운명이 결정돼선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줄'이 아니라 '룰(rule)'이다."
Q. 8·22 전대에서 특정 후보를 밀지는 않겠다고 했다.
A: "그렇다. 큰 틀에서 당의 1차적 숙제는 '민주성의 회복'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지키는 당이라는 확신을 국민들께 강렬하게 드려야 한다. 맨날 부르짖는 게 '자유민주주의'인데, 민주주의가 진보진영의 전유물이 되는 순간 우리는 죽는다. 혁신안이 여러 갈래로 가고 있는데, 아쉬운 대목이다. 당헌·당규에 윤석열, 이름 하나 적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계엄 때부터 민주성을 기준으로 당내 의사결정을 되돌아봐야 한다."
Q. 인위적 인적 청산은 쇄신이 아니란 뜻인가.
A: "이 상황이 오기까지 책임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도 절절한 책임이 있다. 윤희숙 혁신위원장의 선의는 의심하지 않지만 (진행)속도가 좀 아쉽다. 1단계 의원-2단계 당원-3단계 지지자 등 (차례로) 공감을 얻어야 하나씩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정치에서 혁신은 연구실에서 하는 게 아니다. '짜잔, 이거 처음 들어봤지' 하고 내놓는 순간, 듣는 사람은 99% 저항한다. 학생의 반성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 달라진 모습을 얼마나 행동으로 보여주느냐다."
Q. 계파 갈등 해소를 거듭 강조했다.
A: "선배 한 분이 '우리 당은 친박(親박근혜)과 친이(親이명박) 간 싸움으로 공천 학살이 일어난 뒤로는 계파정치가 금기시 돼있다'고 하더라. 피비린내 나는 과정을 거쳐 명목상 평화가 유지되고 있기에 또 그리로 갈 수는 없다. 물론 100여 명이 모두 '원 보이스(one voice)'가 될 순 없겠지. 건강한 경쟁은 허용해야 된다. 또 줄 (잘) 서서 한 자리 하고, 당 권력의 중심이 되는 일은 막자는 것이다."
Q. 친윤(親윤석열)과 친한(親한동훈)이 정말 화합할 수 있다고 보나.
A: "할 수 있다. 또 그런 리더십이 나와야 한다. 양측 모두 대표 격인 이들이 '계파는 없다'는 선언을 해줬으면 한다. 화학적·물리적으로도 섞여야 한다."
Q. 그런 면에서 '민주당을 벤치마킹하자'고 했다.
A: "계파와 관계없이 살려야 할 사람이 살고, 죽어야 될 사람이 죽어야 한다. 민주당은 왜 5선 의원도 상임위원회에서 끝까지 앉아있는 줄 아나. 공천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법안 관련 상임위 활동을 노출하기 위한 언론인터뷰도 평가에 포함된다. 우리도 의정활동과 내년 지선 성과를 공천과 연계시켜야 한다고 본다.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악마와도 손 잡는 게 정치다. 선악 구도로 상대를 보는 것은 조로아스터교지, 보수의 정치가 아니다."
Q. 책에서 다음세대 육성을 위한 '보수미래리더십아카데미' 설립 구상도 내놨는데.
A: "미국 공화당이 인재들을 교육하는 기관과 MOU(업무협약)를 맺어보려 한다. 공화당은 오바마가 집권했을 때 당원 교육과 함께 경합주(州)의 주지사들을 발굴해 훈련시켰다. 이 '스윙 스테이트'가 우리로 따지면 수도권이다. 트럼프가 지난 대선 당시 경합주에서 모두 승리한 것은 이런 투자 덕분이다. 맨날 (밖에서 후보를) 수입만 한다고 한탄하지 말고, 키워야 한다."
Q. 마지막으로, 보수가 '다시' 이겨야만 하는 이유는?
A: "한 방의 실수로 지금까지 쌓아온 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한미의원연맹 소속으로) 미국에 가서 놀랐다. 우리나라에 관심이 없다. '2+2' 통상회담을 취소한 방식을 보면 말이 안 된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풀어나감에 있어서 '책임 있는 자유', '질서 있는 변화'가 더 맞는 방식이라고 본다."
약 2시간의 대화 동안 조 의원은 '차떼기' 위기를 극복한 천막당사 시절을 자주 입에 올렸다. '어차피 맞을 매'는 빨리, 자진해서 맞았던 결단이 당을 살렸다는 각성에서다. 밀실논의 관행을 깨고, '국민들이 들어선 안 될 얘기는 하지 않겠다'고 했던 박 전 대통령의 발언도 언급했다. 내년 지선을 고려하면, 반성과 쇄신의 기한은 6개월이 마지노선이란 게 조 의원의 생각이다. 아울러 "여기에 저항이 되는 이들은 내년 초까지 2선 후퇴하는 그림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대 후보 전원을 비롯한 당 의원 106명에게 이번 저서를 전달할 예정이다. 함께 보낼 친서에는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게 한 복원력, 그 회복력이야말로 '보수'라는 이름의 숨은 근육"이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