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아파하다 만나게 되는 나와 너의 '리얼 페인'[노컷 리뷰]

외화 '리얼 페인'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역사적인 비극이라는 거대한 고통 앞에 선 개인의 고통은 가짜 고통일까. '소셜 네트워크' '카페 소사이어티' 등으로 유명한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가 연출자로 돌아온 두 번째 장편 '리얼 페인'은 역사의 트라우마 안에서 개인의 트라우마를 이해해가는 여정을 고통과 웃음을 교차시키며 그려낸다.
 
생김새부터 성격, 취향까지 모든 것이 다른 두 사촌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키에란 컬킨)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오랜만에 재회한다. 한때는 형제처럼 친밀했지만 각자의 삶과 가족 등의 이유로 멀어졌던 둘의 관계는 할머니의 고향인 폴란드를 방문해 투어를 떠나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첫 연출작 '웬 유 피니시 세이빙 더 월드'로 선댄스의 부름을 받았던 제시 아이젠버그 감독은 두 번째 연출작 '리얼 페인'으로 제40회 선댄스 영화제 각본상을 거머쥐었다.
 
실제 가족사를 바탕으로 한 '리얼 페인'은 정반대 성격을 가진 두 사촌 데이비드와 벤지가 할머니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떠난 폴란드 여행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며 제목처럼 '진짜 고통'이란 무엇인지 넌지시 질문을 던진다.
 
외화 '리얼 페인'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요즘 표현대로라면 대문자 I인 데이비드는 공항으로 향하면서도 무엇이 불안한지 사촌 벤지에게 강박적일 정도로 끊임없이 음성메시지를 남긴다. 그런 데이비드와 달리 벤지는 대문자 E 성향의 인물이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무리 속으로 들어가길 꺼리는 데이비드와 달리 쉽게 무리로 들어간다.
 
영화는 홀로코스트 역사 투어라는 어두운 시대의 유산을 비추지만, 해당 주제를 다루는 여타의 영화처럼 비극적인 역사가 가진 슬픔과 무게감을 설명하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다만 마치 관객들 역시 투어의 일원이 된 것처럼 역사의 순간들을 목격하게 한다.
 
대신 '리얼 페인'은 거대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면서 현재에 놓인 개인의 이야기로 향한다. 다시 말해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의 트라우마 안에서 개인의 트라우마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받는지, 그 안에서 우리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짚어나간다.
 
모든 걸 밖으로 드러내고, 필터 없이 말을 던지는 벤지는 당연히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거리낌이 없다. 솔직한 성격의 벤지는 타인의 고통, 과거의 고통에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고통은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참고, 드러내지 않던 데이비드는 투어 일행 앞에서 현재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사건과 감정을 바깥으로 쏟아낸다.
 
외화 '리얼 페인'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사실 '리얼 페인'이라는 투어의 목적은 '진짜 고통'이 질문하고, 무엇이 '진짜 고통'인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아가는 것이다. 영화 속 홀로코스트 투어를 따르던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벤지의 진짜 고통을 알아가는 과정에 놓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의 시작, 벤지는 일찌감치 공항해 도착해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고 데이비드에게 말한다. 그 말 속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는 엔딩에 가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벤지는 투어를 다니며 종종 돌아가신 할머니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 속 할머니는 벤지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건 할머니의 죽음은 단순히 피를 나눈 가족의 죽음 이상으로 벤지가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존재의 상실이었다는 점이다. 웃으며 지나가는 사이, 먼 과거 타인들의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 눈에 담는 여정 사이에서 벤지의 고통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외화 '리얼 페인'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벤지는 투어 일행과 웃고 떠들며 장난치다가도 역사 속 죽음과 고통이 서린 장소에서는 지나치게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신만큼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타인을 보며 자신처럼 과거의 고통을 깊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역사의 비극 앞에 모두가 '진짜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벤지가 겪은 개인의 고통은 가짜 고통이 되고, 사소한 고통이 된다.

벤지의 고통이 머나먼 역사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은 조그마한 돌멩이다. 벤지는 '진짜'가 필요하다며 역사의 비극 속에 사라진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해 비석 위에 돌을 얹는 행위를 한다.

이후 할머니의 옛날 폴란드 집 앞에 서게 된 벤지에게 데이비드는 이번에도 돌멩이를 놓아두며 애도의 시간을 갖자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동을 본 폴란드인은 그 집에서 살고 있는 노인을 위해 돌을 치우라는 조언하고, 결국 두 사람은 놓아뒀던 돌을 주머니에 넣은 채 돌아선다.
 
벤지가 붙잡아두고 싶었던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폴란드는 할머니의 과거의 기억 중 하나일 뿐이다. 할머니에 대한 진정한 추모는 옛집에 돌을 놓는 것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벤지가 겪고 있는 상실의 고통, 즉 자신의 '진짜 고통'을 마주하고 보듬을 때 이뤄진진다. 그리고 그것이 벤지가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아가도록 할 것이다.
 
외화 '리얼 페인'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여정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엔딩의 장면은 이 비극적인 코미디가 희망이길 바라게 된다. 그리고 시작에서 나왔던 타이틀 자막 '리얼 페인'과 엔딩의 '리얼 페인'은 결국 다른 의미였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홀로코스트가 벤지의 '진짜 고통'이라 생각했지만, 벤지가 겪은 상실의 아픔이야말로 '리얼 페인'이었음을 목격했다.

벤지는 여정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는다. 마치 여정을 떠날 때처럼 사람들을 구경한다는 핑계로 남아 의자에 앉는다. 벤지의 얼굴을 줌인해 가는 카메라, 슬픔을 머금고 웃는 벤지의 모습은 어쩌면 자신의 '진짜 고통'을 느끼는 진짜 여정의 시작이라 짐작하게 만든다.
 
고통과 기억, 슬픔과 웃음이 교차하는 '리얼 페인'을 낯설면서도 가깝게 와닿게 만드는 건 쇼팽의 음악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흐르는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쇼팽의 음악은 폴란드의 풍경, 홀로코스트가 남긴 흔적들, 그리고 웃는 얼굴 아래 감춰진 벤지의 슬픔과 공명한다.
 
여기에 두 배우의 열연은 관객들을 스크린 안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키에란 컬킨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히 최고라 부를 수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엔딩에서 보여준 그의 얼굴은 끝끝내 관객을 붙잡을 것이다. 여기에 제시 아이젠버그는 배우로서는 물론이고 감독으로서도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했다.
 
90분 상영, 1월 1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외화 '리얼 페인' 포스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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