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에 포획된 윤석열, 제압한 노태우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현재의 집권당이나 정부와 같은 중간우파가 극우를 견제하는 데 상당한 정도 성공하고 있다."
 
노태우 정부에서 첫 국토통일원 장관으로 발탁된 이홍구 전 장관이 지난 1989년 3월 당시 보수 강경세력의 조직적 반발에도 정부가 대북 및 북방정책을 밀고나간 상황을 평가한 대목이다. 노태우 정부를 '중간우파'로 설정한 대목이 흥미롭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의 12.3 내란사태는 국회와의 소통을 차단하고, 부정선거론 등 음모론을 펼치는 극우 세력에 스스로 함몰된 결과이다. 
 
반면 전두환 정부와 함께 1979년 12.12 신군부 내란사태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노태우 보수정부는 오히려 여권 내 극우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전향적인 대북·북방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전신,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노태우 정부에서 나왔다. 한소·한중수교 등 공산권을 상대로 북방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것도 노태우 정부이다. 
 
냉전 속에서 북한을 동반자로 포용하는 이런 전향적인 정책은 국민적인 합의가 없으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소야대의 정치구도에서 정치적 타협과 국민적 합의를 가능하게 한 이유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설명한 신간 서적이 나왔다. 1992년 통일부에서 공직을 시작한 백태현 전 통일 비서관의 신간 "통일로 가는 대통령 리더십-남남갈등을 넘어 남북통일로"이다. 
 
저자는 국민적 합의를 가능하게했던 요인을 대통령의 세 가지 리더십, 즉 국민소통 리더십과 정치협상 리더십, 의제설정 리더십으로 설명했다.
 
우리 국민이 개개인은 물론 국가와 민족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공감할 수 있는 통일정책의 의제를 설정해 폭넓은 국민소통과 유연한 정치협상 리더십으로 관철시켰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저서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통일과정에서 남북 교류협력과 '남북연합'이라는 과도 단계를 처음 설정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들과 직접 만났다.

1988년 6월부터 6개월 동안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통일문제 간담회 및 세미나를 250회 개최했는데, 대학생까지 포함해 모두 2304명이 참여해 정부에 의견을 개진했다. 같은 기간 국민소통을 위해 1만 6801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도 통일 방안에 반영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대선 득표율은 역대 최저인 36.6%에 불과했다. 게다가 13대 국회는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구도였다. 여야 합의와 초당적 협력이 없이는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저자는 노 대통령의 정치협상 리더십이 발휘된 대목으로 지적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스스로 "내가 센터포워드(최전방 공격수)가 아니고 세 분 야당 총재(평화민주당 김대중, 통일민주당 김영삼,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들이 센터포워드이다. 4당이 같이 해야 한다. 다른 민주적인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13대 국회에서는 개원 직후 여야 4당이 참여하는 통일정책특별위원회가 구성돼 공청회 등을 통해 통일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창출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북한을 동반자로 규정한 노태우 정부의 7.7선언과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발표 전에 여야 합의를 거쳤다. 특히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경우 국회에서 대통령의 특별선언 형식으로 발표됐다는 것은 통일정책에 대한 국회 및 국민소통과 관련해 여러 가지로 함의하는 바가 있다.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 추진에 난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태우 정부 출범초기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열기, 급진좌파의 주장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북한의 공세적인 통일전선도 문제였으나, 이른바 '극우'로 불리는 보수 강경세력의 강력한 도전이 있었다. 
 
군 출신인 박세직 당시 안기부장은 노 대통령의 승인 하에 이뤄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방북을 비난하면서 정 회장과 북한의 '금강산 관광 합의'에 대해서도 "사문서로 법적 효력이 없다"고 비난했다. 
 
특히 1989년 2월 8일 열린 청와대 수석회의에서는 노재봉 특보가 "정 회장의 북한 방문은 적성국가와의 외교과정에서 불법성을 노출한 문제"라고 노태우 대통령 면전에서 비판하는 일이 벌어졌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보수권력 내부의 심각한 균열을 드러내는 신호",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 강경파의 반발·저항에 따른 권력의 내분"으로 평가했다. 
 
이어 보수 강경세력 중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1989년 3월 14일 노 대통령의 '대북 유화정책'에 항의하며 사표를 제출했고, 일주일 뒤에는 민병돈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육사생도 졸업식 연설에서 '우방국과 적성국의 개념혼돈', '환상과 착각' 등을 언급하며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반발에 단호히 대응하며 제압했다. 김용갑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고 민병돈 교장을 해임했을 뿐만 아니라 예편시켰다. 동시에 내분을 수습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대응에 나섰다. 방향은 남북교류협력의 합법화였다. 

1989년 6월 12일 '대통령특별지침 1호'의 형식으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기본지침', 한 달 뒤 '남북 교류협력 세부시행지침'을 발표하고, 이를 토대로 1990년 8월 1일 분단이후 처음으로 북한과의 교류협력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남북교류협력법의 제정·시행·공포가 이뤄지게 된다. 
 
노 대통령은 보수 강경파의 목소리도 적절히 수용했다. 보수우익은 1972년 7.4 공동성명에서 남북이 합의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원칙 중 '민족대단결'이 국내 친북세력의 확산 근거가 될 수 있다며 폐기를 주장했다.

노 대통령은 89년 8.15 경축사에서 '민족대단결'을 '민주'로 바꾸었고, 이후 '자주, 평화, 민주'의 통일 3원칙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통일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다. 
 
저자는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대북·북방정책의 성공요인에 대해 "야당과의 협력·협치 만이 아니라 여당 내 반발세력을 통제할 수 있는 리더십이 중요하다"며, "대통령이 소통지향적일수록 극좌·극우 극단세력에 대한 견제와 억제를 통해 대북정책에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저자는 다만 노태우 정부의 한계에 대해 집권 3년차인 1990년 3당 합당을 통한 보수대연합을 지적하며 "통일정책에 있어서도 여야 합의 및 국민적 합의 기반이 퇴색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이후 보수 진보 양 진영 간의 소위 '남남갈등'의 근원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한민족공동체방안의 국민적 합의를 형성한 대통령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남남갈등'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아이러니를 느낀다"는 것이다.

연합뉴스

백 전 비서관은 CBS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일각에서는 노 전 대통령을 '물태우'로 평가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며 "오히려 보수정부라는 점을 적극 내세워 극우세력의 반발을 막아내고 전향적인 정책추진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백 전 비서관은 "공교롭게도 자신의 책이 출판된 다음 날에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있었다"며 "만감이 교차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백 전 비서관은 "우리 사회 내에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간의 정치적 공감대, 그리고 여야 합의와 초당적 협력으로 상징되는 국내 정치적 통합, 국민적 합의기반을 가진 정책이어야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며, 그런 점에서 "진정한 민주화야말로 대북·통일정책의 전제"라고 강조했다.

"바보야! 통일문제는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국내 정치야!"라는 경구가 백 전 비서관의 결론이다. 적어도 기자에게는 이 말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파탄 낸 윤 대통령의 12.3내란 사태에 대한 경구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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