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열두 살 소녀는 아버지 책장에 거꾸로 꽂혀있던 사진첩에서 참혹한 80년 5월 광주를 처음 봤다. 총상으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신, 칼에 찢겨 깊게 패인 상처들의 모습들이 여과없이 노출된 사진들이었다. 그가 아홉 살이던 때 가족과 함께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일어난 학살이었다.
'소년이 온다'는 그의 분기점이었다. 80년 광주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을 쓰겠다며 방대한 자료 조사에 나선 그가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 페이지에 적었던 질문이 있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 했다. 광주를 들여다볼수록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던 중, 계엄군에 희생된 야학교사 박용준의 일기에 적힌 "하느님, 왜 저에게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두 개의 질문을 뒤집는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는 동안 그는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고 했다.
한강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는 내적 투쟁의 질문을 지고 살았다며,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고 했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선정된 한강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광주 상무관에 놓였던, 벌판에 이름 없이 스러져간 그들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12월 5일부터 12일까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펼쳐지는 노벨 주간과 한강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은 세계는 물론 한국 언론들과 국민들의 특별한 관심을 모을 예정이었다. 베일에 쌓인 그의 수상 소감과 작품 세계를 직접 한국어로 말하는 강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서점에서는 한강의 책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1월부터 서점가 베스트셀러 1위는 '채식주의자'에서 '소년이 온다'로 빠르게 바뀌며 단 두 달 만에 올해 가장 많이 팔린 도서 1위에 올랐다.
소설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목숨을 잃은 중학생 동호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이다. 섬세한 감정 표현, 영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독특한 시점이 읽는 이로 하여금 단숨에 이 책에 빠져들게 한다. 여러 작품 중에서 한강이 애착을 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게 모두가 설레는 연말을 맞이하고 있던 12월 3일 밤 9시 30분경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뜬금없이 TV에 나와 '반국가세력'과 '부정선거 의혹'을 언급하고는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뒤에 알려진 포고령 내용도 의아했지만 결과적으로 '친위 쿠데타', '내란사건'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황당해했다. 2024년 대한민국에서 총과 장갑차로 무장한 최정예 특수부대 군인들을 동원해 국민들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국회 등을 장악하려는 헌정 유린을 '셀프'로 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코미디 같았지만 이내 공포가 엄습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국민 주권주의는 한 순간에 사라질 위기였다.
1979년 전두환 신군부의 불법적 12.12 군사반란과 내란·폭동에 저항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공수부대의 무자비판 발포와 반인륜 범죄가 자행되며 총상으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거나 칼에 찢겨 깊게 패인 상처가 있는 시신들이 광주 상무관을 가득 채웠다. 곤봉에 맞고 군화발에 짓밟히며 피 흘리는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쉴 새 없이 실려갔다.
'소년이 온다'를 보았든, 그날의 광주에 있었든, 한강처럼 5.18 사진첩을 보았든, TV 다큐멘터리를 보았든, 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든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우리 기억 속에 잠재해있던 광주의 그날을 소름끼치게 소환한 날이었다.
작가 한강도 "2024년에 다시 계엄 상황이 전개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무력이나 강압으로 언로를 막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2024년 겨울에 다시 발생한 이런 상황이 다른 점은 모든 상황이 생중계 되서 모든 사람이 지켜봤다는 것"이라며 "맨몸으로 장갑차 앞에서 멈추려 애를 쓰셨던 분들도 봤고 무장한 군인들을 껴안으면서 제지하려는 모습도 보았고, 총을 들고 다가오는 군인들 앞에서 버텨보려 애쓰는 사람들 모습도 보았다"고 말했다.
이어 "마지막에 군인들 물러갈때 잘 가라고 마치 아들에게 말하듯 소리치는 모습도 보았다. 그 분들의 진심과 용기가 느껴졌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고 회고한 한강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가 이미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만세'와 광장에서 함께 불린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광주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민중가요다.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전남대학교 학생 김종률이 희생자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을 위해 1982년 작곡했다. 소설가 황석영이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한 재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쓴 시 '묏비나리'를 바탕으로 작사한 곡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은 1960년 자유당 독재에 항거한 2.28 민주화운동과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 1979년 박정희 유신에 반대한 부마민주항쟁, 1980년 전두환 신군부와 계엄에 항거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서 수 많은 국민들의 희생으로 민주주의를 지켜온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단죄하고 승리한 경험은 민주주의의 자산으로 축적됐다.
12월 3일 시민들은 본능처럼 총칼 무기 앞에 기꺼이 몸을 내던졌다. 국회는 지켜졌고 광장은 새로운 세대들로 넘쳐났다. 촛불 대신 형형색색 LED '응원봉'을 들고 '다만세'(다시 만난 세계) K팝을 부르며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젊은이들로 가득찼다. 불과 8년 전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를 주도했던 세대들은 이 역동적인 MZ 세대의 저항 방식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2024년 부당한 힘으로 국민의 기본권과 주권, 민주주의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자신의 권력과 안위를 지키려는 권력자의 계엄과 내란사태는 결과적으로 핏값을 치른 민주주의 토대 위에 강력하고 새로운 민주 세대의 탄생을 확인시킨 셈이 됐다. 이들은 저마다 소중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 응원봉을 든다. 그리고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만난 세계]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 눈을 감고 느껴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마 눈 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상처 입은 내 맘까지 …(중략)…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 이렇게 까만 밤 홀로 느끼는 그대의 부드러운 숨결이 / 이 순간 따스하게 감겨오는 모든 나의 떨림 전할래 /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그리고 한강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사랑을 이야기 한다.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실- 빛을 내는 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나보다. 한강이 여덟 살 때 쓴 시다.
[1979]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 사랑이란 무얼까? /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