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장애인의 접근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다는 책임을 물어 국가가 당사자들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장애인 접근권'은 헌법상 기본권이라고 최초로 선언했다. 또 국가가 24년 넘게 장애인편의법 시행령 등을 바꾸지 않아 "장애인의 고통이 지속됐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19일 지체장애인 김모씨와 유아차를 이용하는 A씨 등 3명이 장애인의 접근권이 침해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차별 구제 소송에서 원심의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깨고 이같이 판결했다.
대법원은 정부가 장애인인 원고 2명에게 1인당 10만원씩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파기자판을 통해 직접 명령했다. 파기자판은 원심 판결을 깨면서도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대법원이 직접 판결하는 것이다.
대법원은 "장애인의 접근권은 헌법상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장애인에게도 동등하게 보장하고,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가 되는 권리"라고 강조했다.
소송의 쟁점은 국가가 ①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을 장기간 개정하지 않은 것이 입법자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인지(행정입법 부작위) ②그리하여 국가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는지였다.
문제가 된 장애인등편의법의 시행령은 당초 편의점 등 소규모 소매점은 바닥면적 합계 300㎡ 이상일 때만 경사로와 같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할 의무를 부여했다.
하지만 바닥면적이 300㎡를 넘는 편의점은 전국 편의점 중 3%에 불과해 장애인의 접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 시행령이 무용지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정부는 2022년 4월에야 '바닥면적 합계 50㎡'로 조건을 강화했다. 1998년부터 유지된 시행령이 24년 넘게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대법원은 "시행령은 대부분의 소규모 소매점에 대하여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의무를 면제하고 있다"며 "규정이 시행된 후 24년 넘게 개정하지 않은 행정입법 부작위는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장애인의 접근권을 유명무실하게 하여 위법하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국가가 장애인등편의증진법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은 것이 위법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국가배상법에 위배되는 고의와 과실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대법원은 "장애인등편의증진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취지와 목적 및 내용에서 현저하게 벗어나 합리성을 잃었다"며 "사회적 타당성이 없는 행위로서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국가의 행정입법 부작위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일상적으로 부정당한 장애인의 고통이 지속됐다"고 판시했다.
앞서 1, 2심 재판부는 "국가가 장애인등편의증진법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은 것이 위법하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고의나 과실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고, 나아가 국가배상책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대법원은 지난 10월 23일 장애인 접근권 전합 사건을 두고 공개 변론을 열기도 했다. 장애인들은 "편의점, 음식점, 카페, 약국 등 대부분 소매점을 이용하기 어려워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다고 주장했지만, 정부 측은 "최선을 다했다", "위법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특히 대법관들은 "대체 가능한 권리"이며 "최선을 다했다"는 정부 측 주장에 의문을 표했다. 오경미 대법관은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권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조금 놀랐다"며 "그 말은 즉 장애인에게 집에만 있으면서 온라인으로 하라는 것이고, 그때그때 필요한 카페나 편의점을 가는 등 일상생활의 즉자성을 전혀 구현하지 못하고, 미리미리 계획해서 활동보조인을 불러서 마트나 가라는 것"이냐고 날카롭게 물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판결 직후 "판결을 통해 장애인의 권리를 미흡하게 보장하는 행정입법에 대해 법원이 사법통제를 함으로써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장애인의 권리가 법원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