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폐광 후 줄잇는 복합산재 신청…신음하는 화순탄광 퇴직 광부들 ②회복할 새 없이 수술·치료 반복하는 화순 폐광 광부들 ③"법원 가서야" 화순 광부 80% 산재 불승인…수술·치료 하세월 (계속) |
지난해 6월 폐광한 전남 화순광업소에서 근무한 상당수 노동자가 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질병 산업재해를 신청하고 있지만 10명 중 8명꼴로 질병·수술 불승인 처리돼 재심사와 소송을 이어가고 있다.
질병 산재 인정 받았는데도 '수술 불승인'
"목 부위에 이상이 있어 질병산재 신청 승인을 받고 수술 날짜까지 잡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시 수술 불승인 통보를 받았습니다."전남 화순광업소 탄광 막장에서 16년 동안 채탄부 소속으로 석탄 채굴 작업에 투입된 김일만(55)씨는 가장 아픈 부위를 묻자,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김씨는 허리를 구부린 채 매일 1톤 가까운 석탄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그는 반복된 노동으로 인해 어깨와 목이 뻐근한 것이 일상이라고 토로했다.
김씨는 "지난 2023년 화순광업소가 문을 닫기 전까지는 산재 신청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김씨는 광주의 A종합병원 신경외과에서 주치의를 통해 목 디스크(경추 추간판 탈출증, 추간판 협착증)를 포함한 여러 부위의 관절 질환을 업무상 질병 재해로 진단받았다.
김씨는 지난해 6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진행했다. 그는 반년이 지난 올해 1월이 되어서야 신청한 질병 모두를 산재로 인정받았다.
김씨는 곧바로 수술 및 통원 치료 계획서를 공단에 제출했다. 김씨는 "A병원에서 가장 통증이 심했던 목 수술 일자부터 잡았다"며 "3월 4일에 수술을 받은 뒤 5월까지 3개월 동안 수술 경과를 지켜보는 요양 기간을 갖기로 계획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인정 2주 만에 돌연 수술은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김씨는 수술 계획서 제출 이후 갑작스럽게 근로복지공단 광주지사에 방문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근로복지공단 자문의사 10여 명이 이날 김씨의 MRI 등 진료 기록을 살펴보며 통증 부위에 대해 질문했다.
김씨는 이들과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와 '수술 불승인' 판정을 통보받았다. 결국 김씨는 지난 3월 4일 예정된 수술을 변경하고 팔 부위부터 수술했다. 수술 후 요양 기간을 가진 김씨는 현재 목 부위에 대한 수술 승인을 받기 위해 재심사를 신청할 예정이다.
김씨는 "질병 산재가 인정된 것을 보고 수술 날짜까지 잡았는데, 돌연 다른 부위 수술부터 진행하게 됐다"며 "이 같은 경우가 흔치 않다고 들었고, 자가 부담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점이 막막했다"고 말했다.
주치의 수술 소견 있어도 "공단 자문의사 판단 따라"
이는 김씨의 상태를 처음 진단한 신경외과 전문의가 목 부위 수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과 대조적이다.김씨를 담당했던 A병원 측은 "주치의 소견으로 김씨가 수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 맞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근로복지공단에서 수술 불승인 판정이 내려져 병원이 추가로 조치를 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고 덧붙였다.
김씨 사건을 담당한 이수명 노무사는 "20년 넘게 노무사 활동을 했지만, 질병은 승인하고 수술은 허용하지 않는 사례는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업무로 인해 질병이 생겼다는 입증 소견을 주치의에게 전달받았고, 근로복지공단에서 지정한 순천병원의 특별진찰을 통해서 승인을 받아 '두 번의 절차'를 거쳤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근로복지공단은 공단 자문의의 산재 판단 기준은 따로 없으며 명단 공개도 어렵다는 입장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의학 지침에 따라 무조건 자문의사 판단에 따르게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산재 신청자들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서도 자문의사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자문의사의 선정 기준은 근로복지공단 내부 규정으로 정해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근로복지공단 광주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관계자는 "통상 질병이 인정되면 수술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개별 사안마다 다르다"며 "만약 수술 불승인이 났다면 공단은 자문의사의 의학적 소견에 따른 행정절차를 진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질병판정위원회는 질병 승인에 대한 내용만 관여할 뿐 요양 관리는 모두 지사에서 하고 있다"며 "판정위는 위원장을 포함해 3~4명의 의료진이 들어와 판단하지만 의학적 소견이 모두 다르다. 근거 기준은 따로 마련된 것이 없다"라고 설명했다.
근로복지공단 광주지사 측은 "수술 승인 여부는 결국 자문의사의 의학적 판단에 따른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관계자는 "질병 승인과 수술 승인은 따로 판단한다"며 "수술 필요성에 대해서는 자문의사 회의에 참여한 5명 이상의 의료진이 판단하고 공단이 행정절차에 따라 통지한다"고 답변했다.
화순광업소 노동자 20%만 '전부 산재로 인정'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근로복지공단에서 제출 받은 자료를 보면 화순광업소 근무 이력이 있는 질병 산재 신청자 157명 가운데 상병이 모두 승인된 사례는 단 27건에 불과하다. 질병 산재 신청자의 80%는 일부 승인되었거나 전체 불승인된 상태다.
이들 중 대다수는 공단의 불승인에 불복해 이의 신청을 하거나 고용노동부에 재심사를 청구하고, 법원에 소송 절차를 진행·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CBS노컷뉴스가 지난달 27일부터 2주 동안 실시한 '화순광업소 폐광 이후 광부·노동자 산재 실태조사'에 따르면 화순광업소 노동자 가운데 질병 산재를 신청한 응답자 26명 중 21명(80%)이 '질병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한 부위에 대해 재심사나 소송 절차를 밟고 있다'고 응답했다.
재심사나 소송 사유로는 주치의가 증상이 심하다고 판단했음에도 수술이 불승인되거나, 의료 기록상 증상이 확인됐지만 퇴행성으로 간주돼 불승인된 경우가 많았다.
고용노동부 산재보험재심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권동희 노무사는 "근로복지공단 자문의사들이 수술 필요성을 승인하지 않으면 환자는 질병 승인이 되더라도 요양비가 지급되지 않는다"며 "주치의 판단과 자문의사 판단은 다를 수 있지만 둘 중 누구의 판단이 옳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법원서 광부 승소 사례 다수…주치의 소견 인정해
법원에서는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처분에 대해 위법하다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최근 서울행정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이 산업재해 요양 승인을 할 때 환자를 수술한 주치의의 임상적 소견을 자문의 소견보다 존중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지난 5월 8일 공단의 요양급여 불승인 처분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린 서울행정법원 행정3단독 서지원 판사는 "주치의와 자문의의 소견이 다른 경우, 주치의의 소견이 특별히 부당하다고 볼만한 사정이 없다면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산재로 인해 수술이 필요하다는 주치의 소견에 따라 수술을 받았다면, 근로복지공단은 수술비용을 지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4월에도 전남 화순광업소에서 근무한 김모 씨의 요양급여 불승인 처분 역시 위법이라는 판단이 나왔다. 김씨는 2019년까지 23년 동안 광업소에서 근무한 기록을 토대로 요추 협착증 등 질병에 대해 요양급여를 신청했으나, 2020년에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이에 김씨는 처분에 불복해 근로복지공단에 재심사를 청구했지만 기각됐다. 이는 고용노동부의 산업재해보상보험 재심사위원회에서도 기각됐다.
그러나 법원은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사회 평균인이 아니라 질병이 발생한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 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제시했다. 이어 직업환경의학과 진료기록 감정 의사의 판단을 근거로 김씨의 질병이 화순광업소 근무로 인한 질병임을 인정했다.
법원은 앞서 2020년 3월에도 1983년부터 24년 동안 전남 화순광업소 등에서 채탄, 굴진, 기관차 운전 등의 업무를 수행한 박모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화순광업소 광부들은 최초 상병 신청 이후 3년 넘게 걸리는 기간 동안 고단한 법적 다툼으로 지쳐가며 금전적·시간적 부담을 감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