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껍데기' 결핍의 존재들…넷플릭스 '트렁크' 해석[노컷 리뷰]

열린 공간의 한정원 집…'파놉티콘' 연상
떨어진 샹들리에…영화 '매트릭스' 오마주
이서연 '파랑'·노인지 '빨강'…색채 대비

트렁크. 넷플릭스 제공

'샹들리에, 트렁크, 카약…'

겉으로는 화려해 보인다. 하지만 속은 텅 비어 있다. 이는 인물들의 심리로도 투영된다. 결핍을 지닌 존재들의 이야기를 다룬 넷플릭스 시리즈 '트렁크' 이야기다.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는 한정원(공유). 그는 매일 불면증에 시달리며 누군가의 감시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지닌 인물이다.

노인지(서현진)는 성소수자였던 남편 서도하(이기우)의 갑작스러운 증발로 과거에 묶여 있다. 이서연(정윤하)도 산전우울증을 겪으며 남편 한정원에게 벌을 주려 하면서도 그를 소유하려 한다. 윤지오(조이건)는 그런 이서연의 마음을 붙잡으려 한다.

결핍을 지닌 이들은 더 있다. 평범한 가정 속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강윤아(주민경) 역시 '경력단절'로 인한 공허함을 드러낸다. 결혼을 바라보는 결혼매칭업체 NM 대표 이선(엄지원), 노인지를 스토킹하는 엄태성(김동원) 등도 그렇다.

트렁크. 넷플릭스 제공

이처럼 어딘가 비어 있는 존재들의 삶이 한데 모이게 된다. 그것도 기간제 결혼, 이른바 '계약 결혼'을 통해서다.

이 기괴한 결혼 생활은 이서연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러면서 서로의 결핍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노인지가 한정원 집으로 지나갈 때 등장하는 '진입금지' 도로 표시는 순탄치 않을 이들의 결혼 생활을 암시한다.

열린 공간의 한정원 집…'파놉티콘' 연상

좌측부터 가우디가 만든 카사밀라 주택, 구엘공원 내부. 그리고 한정원의 집. 연합뉴스·정재림 기자·넷플릭스 제공

한정원이 사는 집은 보통의 집과 다르다. 곡선으로 이뤄진 건축물은 흡사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1852~1926)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자연의 곡선을 살린 가우디의 건축물과 달리 한정원의 집은 인위적이고 차갑다. 의도적으로 불균형적인 이미지를 구성해 외로움을 부각시킨다.

보이지 않는 공간이 드물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문마저 투명한 한정원의 집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쉽게 노출되는 구조다.

이처럼 열린 공간은 자연스레 통제와 감시로 이어진다. 이는 영국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파놉티콘(원형감옥)을 떠올리게 한다.  파놉티콘은 재소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공간을 최소화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할 수 있도록 원형으로 설계된 교도소다.

폭력적인 아버지(김은석) 밑에서 자란 한정원에게 집은 안전한 공간이 아닌 '감옥'에 가깝다. 타인의 감시로 공포를 겪는 그에게 샤워실만이 유일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으로 다가온다.

특히 샹들리에는 한정원에게 있어 피하고 싶은 대상이다. 작품 초반 한정원을 잠식하려는 샹들리에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다. 한정원에게 샹들리에는 감시의 존재이자, 어머니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로 그의 불안한 심리와 직결된다.

떨어진 샹들리에…영화 '매트릭스' 오마주

트렁크. 넷플릭스 제공

한정원과의 결혼으로 다섯 번 결혼하게 된 노인지의 심리는 마치 트렁크와 같다. 감정 없이 굴러가는 트렁크처럼, 노인지는 기계적으로 "매뉴얼이에요"라고 반복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의 심리는 샹들리에가 떨어지면서 흔들리게 된다.

샹들리에에서 벗어나려는 한정원·노인지와 달리, 이서연은 또 다른 샹들리에를 설치하며 집착을 보인다. 이 집착은 결국 이들을 감시하는 행위로까지 이어진다.

"파란약을 먹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된대요. 가짜 세상 익숙하게 하루하루 사는 거예요. 빨간약은 파란약이 만든 거짓을 뚫고 아픈 진실을 보게 되죠."

작품 속 한정원이 노인지에게 말하는 대사다. 한정원은 이 대사를 통해 이서연에게 벗어나고 싶었던 과거를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수술 과정에서 이서연보다 본인의 아이를 선택했음을 알린다.

이는 위쇼스키 자매 감독의 영화 '매트릭스'(1999)를 오마주한 내용이다. 파란약을 먹으면 평온한 거짓 속에서의 삶을, 빨간약을 먹으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서연 '파랑'·노인지 '빨강'…색채 대비

작품 속 이서연(왼쪽), 노인지. 넷플릭스 제공

이러한 대비는 인물 연출에도 반영됐다.

이서연은 파란색을 중심으로 설정됐다. 한정원에게 건넨 파란약을 비롯해 그가 평소 착용하는 파란색 목걸이, 파란색 톤의 침실, 물에 잠기는 악몽을 꾸는 한정원의 모습 등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노인지는 붉은색으로 표현됐다. 그의 의상은 물론 붉은색 카약과 트렁크, 평소 비트를 먹거나 과거 탱고를 추는 장면까지 더해지면서 이서연과의 색채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때문에 한정원에게 건넨 "해일은 내가 막아줄게요"라는 노인지의 대사가 눈길을 끈다.

이 같은 연출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불'의 관계를 암시하는 동시에, 한정원이 불편한 진실과 평온한 거짓 사이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지 주목하게 만든다.

한정원의 의지로 노인지 역시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열어 보이며 둘의 관계는 가까워진다. 이들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한정원을 차지하려 했던 이서연의 심리는 더욱 불안정해지고 결국 이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트렁크. 넷플릭스 제공

음악 또한 주목할 만하다. 한정원의 불안정한 심리를 표현할 때 의도적으로 긁는 소리를 사용했다.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기계음은 분위기를 단번에 전환하는 포인트로 작용한다. 장면과 소리가 소위 말해 튀지 않고 어우러진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윤지오라는 인물의 감정선이 어수선하게 그려진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노인지에게 "카약이 왜 좋은데요?"라고 묻는 한정원. 이에 노인지가 답한다.

"이걸 타면 섬이 된 거 같아요.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섬이 돼서 떠 있는 기분이요."

그렇게 이들은 각자의 섬이 된다.

넷플릭스 '트렁크'. 김규태 감독 연출. 공유·서현진·정윤하·조이건·김동원 출연. 총 8부작.

트렁크.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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