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탄핵안 표결에 단체 불참하면서 '단일 대오' 모습을 보여줬던 국민의힘이 반나절도 안돼 분열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윤 대통령이 여당에 '구두'로 넘겨준 권한을 두고 '친윤(親尹)'계와 '친한(親韓)'계가 주도권 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애초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이 자기 마음대로 권한을 여당에 일임하는 것 자체가 '헌법·법률 위반'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한동훈 대표는 여기에 편승해 '소통령' 행세를 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군다나 위헌·위법적으로 넘겨받은 권한을 두고도 여당 내에선 서로 주도권을 갖겠다며 권력 투쟁에만 매몰돼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참담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덕수 당사로 불러낸 한동훈…"경제·외교·국방 논의"
8일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와 한덕수 국무총리는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 당사에서 '대국민 공동 담화'를 발표했다. 전날 윤 대통령이 "향후 국정 운영은 우리 당과 정부가 함께 책임지고 해 나가겠다"고 밝힌 것의 후속 조치 차원이었다.한 대표는 "질서 있는 대통령의 조기 퇴진으로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미칠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안정적으로 정국을 수습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겠다"며 "당내의 논의를 거쳐서 구체적인 방안을 조속히 말씀드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윤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없으므로 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국민 다수 판단"이라며 "퇴진 전이라도 대통령은 외교를 포함한 국정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당 대표와 국무총리의 회동을 정례화 하겠다"며 "주1회 정례회동과 상시적인 소통을 통해 경제·외교·국방 등 시급한 현안을 논의하고 대책을 마련해서 한치의 국정공백도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덧붙였다.
한 총리 또한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정에 한 치의 공백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라며 "저를 포함한 모든 국무위원과 부처의 공직자들은 국민의 뜻을 최우선에 두고 여당과 함께 지혜를 모아 모든 국가 기능을 안정적이고 원활하게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종합하면 윤 대통령을 2선으로 후퇴 시킨 뒤 한 대표와 한 총리가 '투톱 체제'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의미다. 특히 내치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국방·외교권까지 제한시키고, 이를 둘이 정례 회동을 통해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한동훈-한덕수 담화' 위헌·위법적…"너희는 뭔데"
한 대표와 한 총리가 대국민 담화를 하는 장면에는 뒷배경에 국민의힘 로고가 그려져 있는 현수막과 당기(黨旗)만이 존재했다.
한 대표가 행정부 총책임자인 국무총리를 국회도 아닌 여당 당사로 부른 점 등을 종합하면, 현 상황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문제는 이들 행위 자체가 헌법과 법률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의 권한은 아무리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제3자에게 마음대로 이양할 수 없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제1조 제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위반이다.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궐위 되거나 사고로 인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국무총리가 권한을 대행한다. 탄핵안이 통과됐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당이 탄핵안을 반대해 놓고는 총리와 함께 직무대행 역할을 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태란 지적이다.
특히 우리 헌법은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한다. 대통령이 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총리가 이를 패싱하고 마음대로 권한을 행사하면 안 된다.
더군다나 이번 공동 담화문의 모양새는 마치 한 대표가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받아 총리에게 지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를 두고 당 내에서조차 "혼자 대통령 놀이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은 한 대표를 향해 "뜬금포로 무슨 소통령 행세하고 싶어서 안달 난, 프리고진보다 못한 자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자는 더 보기 딱하다"고 쏘아붙였다.
한 대표는 윤 대통령이 외교권도 행사하지 않을 것이라도 했는데, 이 또한 헌법 제66조 제1항(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해 국가를 대표한다) 위반이다.
개혁신당 천하람 원내대표는 "헌법이 정한 탄핵, 직무대행 절차를 밟지 않고 대통령의 명을 받아야 할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 특히 외교권을 빼앗는 것은 위헌"이라고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11시 한-한 공동 담화는 실패한 내란의 떡고물을 급히 챙겨보겠다는 한동훈의 욕심만 보이고 내란 국무회의를 주재한 공범 한덕수의 노회한 자신의 자리 보전 공언이 전부로 아무 내용이 없다"며 "국민은 묻는다. 너희는 뭔데"라고 적었다.
친한계만 소집한 한동훈, 친윤계는 '부글부글'…이 와중에 주도권 싸움
대통령의 위헌·위법적인 권한 일임도 문제지만, 이렇게 넘겨받은 권한의 주도권을 두고 여당 내에선 벌써부터 친한계와 친윤계의 기싸움이 시작된 모양새다. 전날 '단일 대오'로 대통령 탄핵안 표결에 단체 불참한 지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한 대표는 공동 담화 발표 이후 당사로 '친한계' 인사들만을 소집했다. 장동혁·진종오·김종혁 최고위원과 신지호·정성국 사무부총장, 곽규택·한지아 수석대변인, 주진우 법률자문위원장, 김건·박정훈·배현진·안상훈 의원 등이다. 친윤계 최고위원 등에겐 별도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공식 의결기구인 최고위원회의 등을 소집하지 않고 친한계 의원들만을 별도로 부른 것을 두고 당 내에선 "한 대표가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권력을 사유화하려고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친윤계 인사는 "총리를 볼모로 잡고 권력을 독차지하겠다는 것"이라며 "당연히 의원총회에서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의식한 듯 국민의힘 4선 이상 중진 의원들은 9일 오전 10시 국회에서 모여 국정 안정화 방안 등 수습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한 대표를 견제하는 모양새다.
5선의 윤상현 의원은 이날 SNS에 "대통령께서 국정 안정화 방안을 당에 일임한 것은 당 최고위원회, 의원총회, 또 여러 원로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여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방안을 모색하라는 의미"라며 "관련된 모든 로드맵은 의원총회에서 중지를 모아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대표는 '한 총리와 여당이 국정운영을 맡는 것이 헌법적 근거가 없다'는 지적에 "총리와 함께 국정운영하겠다는 취지라는 건 어폐가 있다. 총리가 국정운영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고, 당정의 긴밀한 협의는 당연히 그동안 있어왔다"며 "당 대표가 국정을 권한으로 행사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