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주의
"'1승'은 정말 1승을 하는 영화예요. 1승을 하고 싶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필요한 건 오직 '1승'. 이겨본 적 없는 김우진 감독이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1승을 해보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승부에 임한다. 김우진을 연기한 배우 송강호도 인터뷰 내내 몇 차례나 '1승'을 하고 싶다고 했다.
'넘버3' '조용한 가족' '반칙왕'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살인의 추억' '괴물' '밀양' '박쥐' '변호인' '택시 운전사' '기생충' '거미집' 등 송강호의 필모그래피는 언제나 도전적이고 강렬하다. 그런 송강호가 오랜만에 힘을 뺀 모습으로 돌아왔다.
인터뷰 내내 특유의 웃음소리와 함께 호쾌하게 '1승'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송강호는 정말 슬로건처럼 '1승'의 승리를 바라는 마음을 거듭 전했다. 단순히 흥행만을 위한 바람은 아니었다. 지친 관객들에게 조그마한 승리를, 소소(炤炤)한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칙왕' '조용한 가족' '넘버3'의 송강호, '1승'으로 돌아오다
촉망받던 선수에서 퇴출, 파면, 파산 그리고 이혼까지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실패는 죄다 섭렵한 배구선수 출신 감독, 바로 송강호가 연기한 김우진 감독이다. 근근이 운영하던 어린이 배구 교실마저 폐업 수순을 밟고 있던 와중에 해체 직전 위기에 놓인 프로 여자배구단 핑크스톰의 감독 제안이 들어온다. 구단주가 그에게 요구한 건 오직 '1승'이다. 그마저도 대학팀 감독으로 갈 거라는 생각에 내팽개쳤던 김우진은 어느 순간 진심이 되어 1승을 향해 직진한다.
이런 김우진의 모습이 송강호에게는 반가웠다. 이십여 년 동안 무겁고 진지하고 깊이 있는 캐릭터를 맡아오던 그였다. 송강호는 "25년 만에 '반칙왕' '조용한 가족' '넘버3' 때의 모습을 지닌 캐릭터를 만났는데, 그래서 (관객들에게도) 반가운 모습이 될 수 있겠단 생각으로 임했다"라고 했다.
김우진은 짓궂음을 넘어 거친 듯하면서도 고루하기까지 한 말을 쏟아낼 때가 많다. 영화에서 그런 김우진을 두고 '20세기 화법'을 구사한다고 한다. 송강호는 "김우진이란 사람을 보면 상처를 많이 받은 거 같다.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 있는 거다. 나의 열정은 넘치고 넘치는데 현실은 내 열정을 받아들이지 못할까"라며 "그러다 보니 화법 자체도 세련되고 현실에 맞게 하는 것보다 고지식한 사고 방식이 있는 거 같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래서 충돌하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게 변화하고, 가끔 진심이 묻어 나온다"라며 "천방지축처럼 거친 이야기를 하지만, 1승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진지하다. 그런 걸 보면 마음은 순수했던 옛 시절의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걸 알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원래부터 배구를 좋아했고, 중계방송을 할 때면 어김없이 틀어놓을 정도로 송강호는 김우진만큼 배구를 사랑했다. 그렇기에 '1승'의 흥행이 김우진처럼 간절하다. 그는 "배구협회 모든 분이 발 벗고 도와주는 분위기다. 그래서 부담감도 있었다. 배구인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될 텐데…"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을 위해 신진식, 김세진, 한유미, 김연경 등 전·현직 배구 선수들은 특별출연 형태로 힘을 모았다. 여기에 전 배구선수이자 감독인 차상현 해설위원은 시간을 내 현장을 찾아 선수를 연기한 배우들에게 스파이크 등 배구 기술을 가르쳐줬다. 한유미 역시 배우들을 혹독하게 가르쳤다. 송강호는 "그래서 대역 없이 다 할 수 있었다"라고 한 뒤 "'아, 내가 선수 역할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다' 싶었다"라며 웃었다.
국내 최초 배구 소재 영화 '1승'만의 시선
송강호는 이처럼 선수 출신과 배우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1승'을 향해 의기투합한 것이야말로 '1승'의 묘미라고 했다. 한유미, 신진식, 김세진, 김연경 등 특별출연으로 뜻을 모은 배구 선수들은 물론이고 선수 출신 시은미는 핑크스톰 내 에이스 이민희 역으로 활약했다.
송강호는 "이런 실제 배구인들의 모습도 보이지만, 모델 출신 배우와 기존 배우 등이 연기한 입체적 캐릭터가 묘한 시너지가 되어 한 팀이 되어간다. 처음엔 오합지졸이었지만 하나씩 맞춰져 힘을 발휘하는 모습이 실제와 잘 맞아떨어졌다"라며 "그런 재미는 다른 어떤 영화와도 다르다"라고 자신했다.
그는 '1승'을 통해 처음 호흡을 맞춘 박정민에 대한 자랑 역시 아끼지 않았다. 박정민은 '1승 하면 20억'이라는 파격 공약 내건 핑크스톰의 관종 구단주 강정원 역을 맡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을 선보였다.
송강호는 "'파수꾼' 때부터 너무너무 좋아하고, 팬이었다. 그 뒤로도 박정민이 보여준 캐릭터의 힘은 탁월하다"라며 "타고난 재능도 있겠지만, 박정민을 유심히 보면 본인의 소양을 끊임없이 닦고 보이지 않게 차곡차곡 켜켜이 쌓아간다. 그렇기에 탁월하고 입체적인 캐릭터 해석과 표현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참 놀라운 배우다. 새삼스럽게 놀라운 배우라고 생각한다"라며 "같이 연기할 때도 보면, 자신이 출연하는 장면에서 장악력이 예사롭지 않다. 에너지가 넘친다"라고 극찬했다.
그는 '거미집'(각본)부터 '삼식이 삼촌' '1승'까지 세 작품에서 함께한 신연식 감독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송강호는 신연식 감독이 가진 강점을 '시선'이라고 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의 아름다운 시는 기억하지만, 그분의 삶의 뒤안길이나 발자취는 잘 모른다. 그런데 '동주'에서 역사의 아픔을 끄집어내는 시선이 좋았다. 그래서 꼭 만나보고 싶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1승'의 경우 배구라는 스포츠가 처음 영화화된다는 것도 그렇고, 스포츠 영화의 전형적 패턴이기도 하겠지만 완벽한 사람이 모여 끌고 가지 않는다는 것 역시 신 감독만의 시선"이라며 "감독이든 선수든 뭔가 허점이 있고, 사회인으로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좌절하고 패배감에 젖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한 건 신연식 감독만의 시선"이라고 말했다.
송강호가 관객에게 전하는 '1승'의 가치
1승을 넘어 우승까지 거머쥔 김우진 감독처럼, 송강호 역시 자신만의 길을 걸어오며 한국 영화사에 '배우 송강호'의 인장을 찍어왔다. 그 길에서 '기생충'을 비롯해 '택시운전사' '변호인' '괴물'까지 총 4편의 천만 영화와 1억이 넘는 누적 관객 수를 보유한 배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송강호는 30년 배우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성적만을 생각해 안전한 선택을 한 적이 없다. 그는 "결과를 예측할 수도 없지만, 결과를 생각하고 안전한 선택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검증이 안 되고 위험할 수 있지만,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고 배우로서 도전해 보고 싶은 이야기들을 선택해 왔다"라며 "어느 구간에서는 뭘 해도 그렇게 잘 되는가 하면 어느 구간에서는 잘 안될 때가 있다. 인생이 그러하듯이 그런 리듬이 쭉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어떤 배우도 다 이런 리듬 속에서 살고 있지 않나"라고 했다.
승패를 예측하기보다 김우진처럼 오로지 한 작품만을 바라보며 도전했다. 새로운 도전 앞에 자신을 던져두길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 남자배우 최초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송강호는 매 작품 자신을 증명해 왔다.
배우 생활을 하며 김우진처럼 간절하게 '배우 송강호'를 재증명해 보이고 싶다는 열망을 가져본 적 있냐고 물었더니 "매번"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저뿐만 아니라 배우들은 다 그런 마음이에요. 내가 어떻게 한 번 보여주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나태하지 않고, 정말 초심으로 돌아가서 '이 작품도 그렇게 하리라'라는 마음은 매 작품 있어요."
'1승'을 통해 송강호가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가 내내 말했듯이 '1승'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집에 갈 때 맛있는 통닭을 사 가서 애들하고 맛있게 먹어야지, 이것도 1승이 될 수 있어요. 이런 작은 위안을 준다면 1승이 100승이 될 수 있잖아요. '1승'이 조금이라도 관객분들에게 희망이 되고, 자신감을 회복시킬 수 있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