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은 대한민국 국민의 몫[베이징노트]

리커창 전 중국 총리. 신화통신 캡처

한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1인자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리커창 전 국무원 총리의 장례식이 치러진 지난해 11월 2일.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한 중국인의 집을 방문했다. 이 중국인은 반주로 중국 전통술인 바이주를 내놓으며 "집안 어르신이 상을 당해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오늘 그 분을 보내드리고 처음으로 술잔을 들었다"며 건배를 제의했다.

사실 이 중국인이 말하는 '집안 어르신'은 이날 장례식을 치른 리 전 총리를 말한다. 그는 리 전 총리의 이름은 입에 올리지 못하면서 "지금 당신들이 보는 중국의 모습이 중국의 전부는 아니다"라며 애둘러 현재 중국의 상황을 한탄했다. 곧 그의 눈시울이 불거졌고 함께 초대받은 다른 중국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2인자로 밀려난 총리 시절에도 시 주석의 정책에 쓴소리를 낸 리 전 총리가 사망하자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애도 물결이 일었지만 사회 불만으로 옮겨갈까봐 중국 당국은 이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자신의 집에서조차 '리커창'이라는 이름을 입밖에 내뱉지 못하는 이 중국인을 바라보며 안타까움과 함께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긍심을 느꼈다.

리커창 전 총리를 추모하는 꽃이 가득하다. 웨이보 캡처

지난 1월 총통 선거 취재를 위해 찾은 대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중국과 대만 모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 공공기관 주재원과의 식사자리에서 "어디가 더 나은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업무 측면에서는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중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더 도움이 됐다"면서도 "생활하기에는 자유가 보장된 대만이 더 낫다"고 대답했다.

당시 1년 가량 중국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언론을 통제하는 중국 당국에 실망이 컸던 차라 이 주재원의 말에 더 공감이 갔다. 동시에 정부와 지자체, 국회와 정당, 그리고 민간 기업과 단체까지 자유로운 취재가 보장된 한국의 '언론 자유'가 순간 그리워졌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긍심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사건이 3일 발생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밤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또, "지금 우리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입법 독재를 통해 국가의 사법 행정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국회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이 된 것"이라고 비상계엄 선언을 야당 탓으로 돌렸다.

소위 '쌍팔년도'에나 통할듯한 반공용어가 윤 대통령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들으며 한숨이 튀어 나왔다. 평온한 밤시간의 정적을 깨고 45년 만에 등장한 대통령의 비상계엄 발표에 급하게 속보 방송에 투입된 뉴스 앵커들과 기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헛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그러나 황당한 상황도 잠시,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내용의 계엄사령관 명의로 포고문을 보고 경악을 금치못했다. 헌정 질서를 수호하겠다며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헌법 정신의 핵심인 집회·결사, 그리고 언론·출판의 자유를 탄압하다니!

곧이어 경찰이 국회 출입구를 폐쇄하고, 국회로 진입한 육군 특전사 대원들이 무장한 채 창문을 깨고 본회의장 진입을 시도하자 국회 직원과 보좌진 등이 몸싸움을 벌이며 이들을 막아섰다. 또, 군 장갑차가 서울 한복판을 횡단해 국회로 향하는 사진이 공개되고, 군 헬기가 국회 상공을 비행하는 장면이 생중계 됐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에서나 봤던 장면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지켜보며 정상정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동시에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 측면에서 중국보다 한국이 훨씬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중국의 체제를 비판했던 그동안의 기사가 떠오르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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