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맑은 악의를 가진 부잣집 아가씨부터 매란국극단의 간판스타 왕자님까지,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를 통해 배우 정은채는 또 한 번 자신의 스펙트럼을 증명했다. 종영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정은채는 쇼트 커트에 '왕자'란 수식어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갓 드라마에서 빠져 나온 모습을 하고 있었다.
"촬영은 벌써 4~5개월 정도 됐어요. 문옥경 역할을 해냈다는 자부심이 있죠. 대체 불가능하단 말도 좋아요. 저만의 색채가 있다는 거니까요. (문옥경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 부담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시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랄까요. 다른 작업에 투입되면 문옥경의 짐은 바로 벗어던질 거 같아요. 아직 차기작이 정해지지 않아서 빨리 작품을 하고 싶고요."
극 중 문옥경은 주인공이자 소리 천재 정년이(김태리 분)의 멘토로 활약한다. 정년이는 문옥경을 보며 남역 국극 배우로의 꿈을 키우게 된다. 때문에 드라마 속 펼쳐지는 국극에서 1인자 다운 실력을 보여줘야 했다. 때문에 '극중극' 장면에 고심을 더했다.
"앞으로도 사실 쉽지 않은 시도인 거 같아요. 그걸 용기 있게 연출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시청자들이 빠져들어서 볼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궁금하기도 했을 거예요. 저 역시 과감하게 그 장면들을 지지했고, (충분히) 살려주셔서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드라마의 가장 큰 포인트인데 시청자 분들도 사랑해주셔서 감사하고요. 저의 은퇴극이었던 '바보와 공주' 장면이 기억에 가장 남아요. 문옥경의 삶에서 마지막 무대였을 거고, 저도 마지막 국극 연기를 한 거라서 마음이 엄청 복잡미묘했거든요. 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혜랑이(김윤혜 분)와 옥경이의 관계, 그리고 미래를 대변하는 장면이라 그런 감정들이 시너지가 있기를 바랐어요."
혜랑과 옥경의 관계는 마치 한 노래의 제목처럼 '사랑보다 먼, 우정보단 가까운' 사이다. 국극 배우가 되기 전부터 서로 의지했던 가족인 동시에, 무대에서는 '왕자'와 '공주'로 다시 없을 파트너가 된다. 정은채는 애증, 연민, 집착 등 온갖 감정이 뒤섞인 관계를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을까.
"두 사람은 초창기부터 시작된 관계죠. 서로 가장 매력적인 부분, 강점, 그리고 가장 나약한 모습들까지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아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가족이기도 하고,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무대 위에서는 완벽한 파트너이기 때문에 사랑, 우정, 연민 등 둘의 관계는 복합적이에요. 마지막에 혜랑이를 '공주'라고 부르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옥경이가 떠나며 둘의 관계가 좌절되거든요. 오글거릴 수도 있고 일상적인 대화는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할 때 어색하거나 부끄럽단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무대 위에서 '공주'와 '왕자'로 너무 오랜 세월을 같이 지냈기에 그랬을 거예요. 윤혜와 저도 실제로 '공주'와 '왕자'로 공존하며 지내서 전혀 불편함이 없었어요."
촬영 현장에서 김윤혜와의 호흡은 어땠을까. 혜랑 캐릭터와 김윤혜는 180도 다르지만 매란국극단을 책임지는 여역(여자 역) 배우로서 정은채와 비슷하게 왕관의 무게를 견뎠다. 춤과 노래,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완벽하게 해내야만 했다.
"윤혜는 너무 수수하고 털털해요. 대학생처럼 귀여운 소녀인데 공주로서의 왕관과 무게감을 견딘 게 정말 대견해요. 연습량이 정말 어마어마했거든요. 해내야 하는 안무도 그렇고 할 게 많은 캐릭터 중 한 명이었는데 끈질기고, 집요하게 매달려서 하는 걸 보고 멋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너무 훌륭하게 해내서 소름끼치기도 했고요. 특히 즉석에서 나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표현 방식으로 연기하는 걸 보고 유연한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혜랑이라는 역할을 입체적으로 잘 연기해줬어요."
극 중에서는 자신이 '멘토'였지만 함께 출연한 배우 김태리를 보면서도 많은 것들을 배웠다. 나이와 관계없이 정은채는 타이틀롤인 김태리가 가졌을 부담감을 이해하면서 그를 '리더'로 인정했다.
"워낙 만나고 싶은 배우 중 한 명이었어요. 태리가 너무 완벽한 정년이 연기를 해줬고, 자신만의 정년이를 만든 거 같아요. 많은 과제들을 짊어지고 있었을텐데 긴 시간 동안 그런 무게감을 안고 있으면서도 정말 너무 멋지게 정년이를 표현해 준 게 대견해요. 자랑스러운 저의 동료이고, 현장에서는 좋은 리더였어요. 현장 분위기도 항상 챙겨가면서 본인 것도 완벽하게 해내는데, 그런 모습에서 배울 점이 너무 많더라고요."
잘생긴 '왕자' 캐릭터라고 해서 굳이 '남성성'을 입히기 위해 애쓴 적은 없었다. 오히려 전형적인 남성성보다 문옥경이 여자이기 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지점에 집중했다. 다른 캐릭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관계가 시작되지만 그 안에서 크고 작은 연대를 통해 결국 각자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룬다.
"남역 배우를 연기한다고 해서 전형적인 남성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배제했어요. 문옥경이 여자라서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함과 디테일, 따뜻한 시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다른 캐릭터들의 관계도 질투와 경쟁에서 시작은 했을 지라도 더 넓게 표현이 되면서 각자 성장을 이뤄냈어요. 여성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해 줄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고, 그렇기에 더 특별한 작품 같아요. 아마 앞으로 만날 수 없는 그런 결의 작품이지 않을까요. 남자 배우가 없어도 제가 있어서 다들 충분하다고 얘기해 주셨지만요." (웃음)
정은채의 재발견을 이뤄낸 쿠팡플레이 '안나' 그리고 글로벌 흥행한 애플 TV+ '파친코' 시리즈, 여기에 '정년이'가 더해지면서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완성했다. 대중은 이제 정은채가 보여줄 새로운 얼굴에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옥경이가 새로운 시도에 대한 갈망을 멈추지 않고, 안주하지 않는 면모들, 그런 부분이 분명히 불안정할 수도 있지만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는 모습들이 있었어요. 저 역시 그렇게 하고 싶죠. 새로운 연기 시도에도 용기를 내려고 하고요. 최근 2~3년 간 찍은 작품이 올해 4개 정도 연달아 나왔어요. 작품을 평가 받고, 캐릭터로 주목 받는 건 너무 중요한 부분이라, 뜻 깊은 한 해였어요. 주어진 연말 스케줄을 잘 소화해 나가면서 마무리할 거 같습니다. 잘 준비해서 내년에도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