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서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고려시대 최영 장군이 남긴 유언입니다. 실제로 그의 무덤에서는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억울한 영혼은 죽어서도 그 애통함을 지니고 있나 봅니다.
그 애통함을 달래주기 위해서일까요? 우리나라는 특정한 사유에 한해, 유죄가 확정된 형사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비록 '망인(亡人)'과 관련한 사건일지라도요. 아래와 같은 경우죠.
형사소송법 제420조(재심이유) |
재심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이유가 있는 경우에 유죄의 확정판결에 대하여 그 선고를 받은 자의 이익을 위하여 청구할 수 있다. 1. 원판결의 증거가 된 서류 또는 증거물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위조되거나 변조된 것임이 증명된 때 2. 원판결의 증거가 된 증언, 감정, 통역 또는 번역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허위임이 증명된 때 3. 무고(誣告)로 인하여 유죄를 선고받은 경우에 그 무고의 죄가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 4. 원판결의 증거가 된 재판이 확정재판에 의하여 변경된 때 5. 유죄를 선고받은 자에 대하여 무죄 또는 면소를, 형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 형의 면제 또는 원판결이 인정한 죄보다 가벼운 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 6. 저작권, 특허권, 실용신안권, 디자인권 또는 상표권을 침해한 죄로 유죄의 선고를 받은 사건에 관하여 그 권리에 대한 무효의 심결 또는 무효의 판결이 확정된 때 7. 원판결, 전심판결 또는 그 판결의 기초가 된 조사에 관여한 법관, 공소의 제기 또는 그 공소의 기초가 된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지은 것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 다만, 원판결의 선고 전에 법관,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에 대하여 공소가 제기되었을 경우에는 원판결의 법원이 그 사유를 알지 못한 때로 한정한다. |
이러한 제도가 있기에, 이른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다가 세상을 떠난 작곡가 故 윤이상씨의 가족도 용기를 냈습니다. 동백림 사건은 박정희 정권 때인 지난 1967년 중앙정보부가 독일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이 있다고 발표한 사건으로, 문화예술계 인사 약 200명이 연루됐었던 사건이죠.
1968년, 윤씨는 간첩 혐의에 대해선 무죄가 나왔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이 선고돼 구속됐었습니다. 애초 2심에서는 징역 15년이 선고됐지만,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되어 결국 징역 10년이 확정된 겁니다. (이 1968년 서울고등법원 판결이 이번 재심 대상입니다.)
이후 국제적인 규명 운동과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2년 뒤 석방된 윤씨는 독일로 귀화했고, 1995년 사망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채 다 벗지 못한 채로요.
불행 중 다행일까요.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반가운 발표를 내놓았습니다.
2006.1.26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동백림 사건 발표문' 中 |
중앙정보부는 피의자들에게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고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 과장했으며 수사 과정에서 심리적 위협은 말할 것도 없고 신체적인 가혹행위도 행사하였고 당시 박정희 정권의 발등의 불이었던 6.8 부정선거 비판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이례적으로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10일 동안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수사내용을 발표하고 특히 정권의 심각한 위협으로 부상한 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북한의 지령에 따른 국가전복 행위로 몰고 가기 위해 1960년대의 대표적인 학생 조직이었던 민비연을 무리하게 동백림 공작단의 일원으로 확대 왜곡하는 등 불행하게도 동백림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
그중에서도, 윤씨를 콕 집어 억울함을 소상히 밝혀주기도 했습니다.
2006.1.26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동백림 사건 발표문' 中 |
거짓말에 의해 국내로 불법 연행되어온 뒤 일부 강압수사에 의해 소극적인 대북행적에 대해 고전적인 간첩죄를 적용함으로써 '윤이상=간첩'이라는 오명을 둘러쓰게 한 것은 부당한 측면이 있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의 피의자로서 독일에서 연행되어 반공법상의 탈출죄 등으로 복역하다가 형 집행정지로 석방 후 대통령 특별사면 조치로 잔형이 면제되어 독일로 돌아갔다. 1980년대 말부터 윤이상은 국내 음악계의 초청에 따라 자신이 당했던 가혹행위에 대한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면서 귀국을 추진하였으나, 우리 정부가 준법서약서 제출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고 결국 귀국하지 못한 채 1995년 베를린에서 사망하였다. |
이러한 발표에 힘입은 윤씨의 유족. 2020년 5월, 죽어서도 억울해할 윤씨를 위해 재심을 청구합니다. 3년의 치열한 심리 끝에 2023년 5월 재심 개시가 결정이 됐는데 검사가 이에 맞서 항고, 재항고를 합니다. 그러나 대법원이 지난해 7월 이를 기각해, 마침내 재심이 열리게 됐습니다.
1968년으로부터 무려 56년이 지난 지난달 24일, 드디어 재심 재판 첫 공판기일이 열렸습니다. 법정에는 긴장감이 맴돌았습니다. 윤씨의 유족은 안타깝게도 함께 하지 못했지만, 진지한 공기 속에 재심이 시작됐습니다.
2024.10.24.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 '동백림 사건' 재심 中 |
재판부 : 피고인의 자녀인 재심청구인이 2020년 5월 재심 청구를 하였고, 2023년 5월 재심대상 판결에 형사소송법 420조 7호, 422조에서 정한 재심 사유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졌으며 이에 따라 재심 사건 심리 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심은 종전 소송 절차의 후속 절차가 아니라, 사건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재판하는 것이므로 새롭게 심리를 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
비로소, 56년 만에, 50년이 넘어서야 재심이 시작된 겁니다. 윤씨의 변호인은 조심스레 변론을 시작했습니다. 윤씨는 '모두 무죄'라면서요.
2024.10.24.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 '동백림 사건' 재심 中 |
윤이상 측 변호인 : 이 사건은 이미 국정원에서 진행한 과거사 위원회에서 확인한 내용, 그다음에 대법원까지 확인된 것처럼 처음 수사 개시부터 불법적인 납치, 감금으로 시작된 사건이고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지속적인 고문으로 피고인 윤이상 같은 경우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할 정도로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강압적인 수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희 입장은 그렇게 조작된 사건으로 저희가 모두 무죄라고 일단 주장을 하고요. |
왜 무죄냐고요? 지금까지 수집된 증거가 모두 '위법한 증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2024.10.24.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 '동백림 사건' 재심 中 |
윤이상 측 변호인 : 결국 검찰 진술, 그리고 법정 진술, 그리고 증거물 2개가 증거로 남아있는데, 처음부터 위법한 사유로 체포돼서 수사된 사건이기에 압수물도 '위법 수집 증거'로 보는 게 명백하고 검찰 조서도 그렇게 보는 게 명백합니다. 법정 진술 경우에도 불법적인 감금과 고문 반복되는 상태에서 법정에서 진술한 것이고, 피고인 뿐 아니라 관련자 모두 그렇게 진행된 게 국정원 진상 조사에서 확인됐습니다. 모두 위법 수집 증거로, 증거 채택이 못 됩니다. 그러면 망 윤이상에 대한 것은 하나도 증거 능력이 없습니다. 적어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어야 합니다. |
하지만 검찰도 쉽게 지지는 않습니다. '공소 유지'가 목적인 검찰은 이에 맞섭니다. 앞서 변호인이 언급한 증거들을 채택해야 한다고 말이죠.
2024.10.24.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 '동백림 사건' 재심 中 |
검찰 : 이 사건의 수사가 진행된 경과나 법원 재판 등에 있어서 절차적 위반 부분이 비교적 중하지 않고 재심 개시 단계에서 불법 부분 이외에 인정된 바 없습니다. 이 사건 사안 성격의 중대성을 고려해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위해서는 최소한 검찰 서류와 법원 공판조서 등이 증거로 채택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재판부도 고민이 깊어 보였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재판부는 양측의 입장을 모두 잘 들었다고 말합니다.
2024.10.24.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 '동백림 사건' 재심 中 |
재판부 : (피고인 측은) 위법 수집 증거에 해당해서 증거능력이 없으므로 공소사실 입증 부족해서 무죄라는 주장이고요. (검찰 측은) 불법구금 사실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검사 작성의 수사 서류와 공판 조서 등 공판에 나타난 증거들의 증거능력이 인정된다는 취지의 주장이시네요. 알겠습니다. |
그러면서 재판부는 재심을 위해 '기록'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2023년에 당초의 기록 확보를 위해 검찰에 문서 송부를 요청했지만, 기록이 검색되지 않는다는 회신서가 도착했다는 겁니다. 재판부로서는 기록이 보존되어 있는 것인지, 보존되어 있다면 어디에 보존됐는지 파악이 안되고 있다고요.
그래서 윤씨 측 변호인에게 관련 서류들을 어디서 확보했냐고 오히려 재판부가 묻습니다. 변호인 측은 "역사적 사건이니, 관련 기록을 책으로 묶어서 낸 것이 있다"고 답변합니다. 검찰 측도 기록을 확인을 해보겠다고 답합니다.
재판부는 양측이 증거를 확보하고 제출하는 데 시간이 조금 소요될 것 같다며, 다음 공판기일을 넉넉하게 잡겠다며 12월 19일로 정했습니다. 56년 전 사건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이렇게 신중하게 고심하며 기록을 모으려는 재판부의 모습을 보니, 과연 윤씨는 누명을 벗을 수 있을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지난 1968년, 대법원의 파기환송 사유를 돌아보며 마칩니다. 부디, 윤씨의 억울함이 뒤늦게라도 풀어지길 바라면서요.
대법원 1968. 7. 30. 선고 68도754 판결 |
피고인이 그동안 음악예술을 통한 활동으로 우리나라를 널리 해외에 소개하였다는 점, (…) 원판결이 인정하고 있는 피고인의 범행사실에 의하더라도 피고인이 반국가 단체인 북괴의 지배하에 있는 평양까지 갔다 왔고, 그동안 여러 차례 동백림을 왕래하면서 북괴 측으로부터 금품도 수수하였고, 지령도 받았으나 피고인의 활동내용이 대부분 서독에서의 대인포섭 활동 및 그 기도에 지나지 않았음이 분명한 바, 양형의 조건이 되는 이상의 모든 사정에 비추어 볼 때, 피고인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한 원판결의 양형은 심히 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논지 이유 있어 원 판결은 파기를 면치 못할 것이다. 원 판결중 피고인 (…) 동 윤이상 등에 대한 각 유죄부분을 파기하고, 그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