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이기적 MZ라고요?"…청년이 말하는 '출산의 조건' ②"'아빠 껌딱지', 레알 가능한가요?"…主양육자 아빠들의 이야기 ③"'우리 아버지처럼'은 안 할래요"…요즘 아빠들의 속사정 (계속) |
"남자들은 길을 잃었다(Men are lost)."
지난해 7월 미국의 주요 일간지인 워싱턴포스트(WP)는 칼럼니스트 크리스틴 엠바의 글을 통해 수년 전부터 "남자,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남성들이 이상해지고 있다(Men, Especially young men, were getting weird)"는 것을 인지하게 됐다고 적었다.
WP는 연애시장에서 낙오한 비자발적 독신주의자(involuntary celibate)를 뜻하는 '인셀(incel)'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위계와 '힘'에 기반한 전통적 남성성이 더 이상 현대 남성들에게 일반적 역할모델(role model)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가족의 생계부양과 함께 사회 경제발전을 주도하며 얻어지고 인증됐던 남성성은 옛말이란 것이다. 인셀과는 결이 다르지만, 국내에서도 마초적 남성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적 굴레('맨박스')를 저어하는 '초식남' 등이 주목받은 바 있다.
△과거의 엄격한 성역할 구분은 (그 이분화가 부른 숱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소년들에게 '남자의 길을 알려주는 각본(a script for how to be a man)'과 같았다는 점, △반면 지금은 '남성의 특수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여성(성)을 폄하하지 않는(that acknowledges male particularity and difference but doesn't denigrate women)' 새로운 남성상이 요구되는 진공상태란 통찰은 한국에도 일정 부분 들어맞는 분석이다.
정우영 신구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MZ세대 남성의 자녀 양육경험을 통한 정책 개선방안 탐색: 육아휴직 경험을 중심으로'(2024)에서 최근 출산 가정의 9할 이상을 차지하는 MZ세대를 두고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독립성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이며 틀에 얽매이지 않는 등 기성세대와 매우 다른 가치관이나 성향을 보인다"고 밝혔다. 또 이들에겐 결혼·출산이 더 이상 필수가 아닌 만큼 본인이 '아빠'가 되길 스스로 선택한 경우, 일·가정 양립에 대한 요구도 여느 때보다 높다고 지적했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도 올 1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분투하는 30대 '요즘 아빠'' 보고서에서 통계청 사회조사 결과의 추이를 들어 "10년 전만 해도 한국 남성은 가정보다 일을 우선시하고 가정은 여성에게 의탁했으나, 이제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추구'(2013년 27.9%→2023년 43.6%)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풀이했다. 통상 결혼과 육아가 개시되는 30대의 남성들은 '일보다 가정이 우선순위'라는 응답이 전 연령대에서 가장 높았고(2023년 기준 24.4%) 실질적 가족 돌봄시간도 최다였다.
연구소는 여성의 사회 진출로 남성 대비 여성의 소득비율이 2022년 기준 84%까지 오른 점 등과 더불어 "X세대(1960년대 중반~1970년대 후반 출생)부터 시작된 부모 및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도 전통적인 남성의 가정 내 입지가 흔들리게 된 요인 중 하나"라고 짚었다. 육아를 등한시하며 가부장의 권위를 앞세운 '아버지'와의 유년기가 썩 행복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토대로 이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성'도 작용했다는 것이다.
실제 기획팀이 지자체 주관 '육아대디 간담회'와 개별 심층인터뷰로 만난 아빠들은 하나같이 시쳇말로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의 줄임말)'에 가까웠던 일방통행적 아버지상(像)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성장과정에서 '어떤 아빠가 되고 싶다'는 선행모델은 부재했을지언정, '우리 아버지처럼은 되고 싶지 않다'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은 상징적이었다.
"우리 아버지와는 반대로"…낳기 전부터 '육휴' 결심한 이유
"약간, (전형적인) '옛날 가부장적인 아버지'셨어요. 저희 아버지가 좀 일찍 돌아가셔서,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타계하셨는데…그 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저희를 사랑한다는 건 느껴지지만 말투나 행동은 아주 무섭고 엄한 분이셨거든요. 무언가 함부로 말한다거나, (같이) 장난을 친다거나 하는 건 전혀 없었죠. 그렇게 했다간 진짜 혼나고…무뚝뚝한 분이셨어요."
공공의료기관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고승남씨는 지난 8월 3일 서울 목동 CBS 본사에서 진행된 1인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이렇게 회상했다. 6살 딸 예리와 두 살배기 아들 희재의 아빠인 승남씨는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러셨던 건 아니라 생각한다"면서도, 기획팀을 향해 "(여러분도) 고등학교 때 아버님한테 뽀뽀를 하거나 안아드리는 일은 없지 않았냐"고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승남씨는 당일 인터뷰에 앞서 7월 20일 경기도여성가족재단 주최로 열린 '경기도 아빠소리' 간담회에서 눈물겨운 육아휴직 경험담을 털어놔 다른 아빠들의 공감과 탄식을 자아냈다. 그는 현장에서 '육아휴직을 실제 써본 아버님은 없나'란 재단 측의 질문에 유일하게 손을 든 워킹대디(!)였다.
2019년 딸을 품에 안아보기 전부터 육아휴직 결심이 확고했던 승남씨는 전 직장에서 육아를 이유로 일을 쉰 최초의 남성 직원이었다. 그는 "회사가 '휴직 후 당할 수 있는 일을 포함해 지금의 자리까지 내려놓고 갈 수 있겠느냐'고 했을 때 저는 오케이(OK)라 했다"며 "2년 정도 휴직했고, 첫째가 저와 떨어지는 걸 싫어할 정도로 둘이 같이 붙어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와 단둘이 캠핑을 가는 등 오롯이 '아빠'의 삶에 집중한 시간은 "너무 좋았"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승남씨는 "육아휴직은 솔직히 '저(의 가치)를 깎는 것'과 똑같다. 1년간 (월) 150만원을 받고 이후론 받은 게 없다. 돈을 안 주면 복직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성과(평가)도 최하위였고, (사내) 제 자리도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상황은 옮긴 일터에서, 둘째를 낳고 휴직을 할 때도 반복됐다. 출근하려고 아이디카드를 찍었더니 '미등록 직원'이라는 알람이 뜬 것이다. 담당과에선 승남씨가 '남자라' 육아휴직을 쓴 거라곤 미처 생각 못하고 '퇴직 처리'했다는, 다소 황당한 설명을 내놨다.
회사 메일과 데이터가 '리셋'되는 고초에도, 승남씨는 휴직을 후회하지 않았다. 3교대인 간호사 업무 특성상, 육휴를 쓰지 않고는 아이와 함께할 시간을 내기가 도통 힘든 탓이다. 그는 "솔직히, 아이를 한 명 키우는 데 드는 돈이 꽤 크다"면서도, 그 '돈'을 벌어다 주는 것만이 아빠의 도리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이가 커서, 사춘기가 되고 성인이 됐을 때 '우리 아빠가 (그래도) 좋은 아빠였구나'라고 느끼면 (제가 되고 싶은) 좋은 아빠라고 생각해요. 주변에서도, 영유아 때는 (어려서) 잘 모르니까 '나중에 잘 놀아주면 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때가 되면 애들은 아빠랑 안 놀아줘요. 애 키우는 선배들을 보면 (아이가) 어느 날부터 아빠를 안아주지도 않고, 얘기도 안 하고…그냥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이에게 가장 주고 싶은 건 정서적 안정성…'버팀목' 되고파"
아빠들의 자녀 양육을 장려하고 관련활동을 지원하는 남성육아 네트워크인 '경기도 아빠하이!'에서 멘토로 활약 중인 김진환(38·IT기업 인사팀장)씨도 아빠에게 다양한 책임을 기대하는 시대적 요구에 적극 부응하고 있는 육아대디다.
딸만 둘(8세 은빈·6세 은우)인 진환씨는 "회사에선 일 잘해야 하고, 요새는 대개 맞벌이지만 돈도 잘 벌어야 하고, 아내에겐 (탤런트) 최수종처럼 잘해야 하고, 아이에겐 '슈돌'(슈퍼맨이 돌아왔다)처럼 잘해야 하는" 게 '요즘 아빠'의 숙명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유년기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이 거의 없는 그는 아버지를 두고 "평일엔 얼굴 보기 힘든 분"이라 돌아봤다. 경제성장기였던 당시 아버지들은 '쎄빠지게' 돈 벌어오는 게 일이었고, 친구들도 비슷한 형편이었던지라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여태 잊히지 않는 주말의 기억은, 동물원에 가고 싶다던 진환씨와 동생을 입구에 내려다주고 또다시 일하러 떠난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나중에 (저희가 다 놀고 나서) 동물원에 데리러 오셨는데, 어떻게 보면 수행기사의 느낌이었죠. 절대적으로 아버지란 분과 시간을 보내는 게 극히 드물었어요. 명절 전에 한 번씩 목욕탕 가는 정도였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 개인이,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갈증 같은 게 좀 있었어요."
그랬던 진환씨는 대학시절 잠시 머문 이모 집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찾았다. 당시 이모부는 주말마다 아침상을 손수 차리셨다. 이모의 솜씨보다 '맛은 없어도 싫어하지 않고' 잘 먹는 사촌들, 이모 부부의 화목한 모습을 보면서 "자녀와 좀 더 친근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아빠"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피어올랐다. "당신을 통해 이런 모습을 흡수했고, 아빠로서 성장하고 있다는 걸 전달해드리고 싶은데…좀 일찍 돌아가셨어요. (요즘) 이모부 생각이 많이 나죠."
이어 그는 "결혼생활과 육아는 약간 '팀플(team play)'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뼈있는 말을 했다. 직장생활과 가족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선 (배우자와)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때로는) 백업으로 들어가거나 전진 배치되는 등 역할을 잘 나누고 시간 분배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마찬가지로 '아빠하이'에 참여 중인 김민태씨도 하나뿐인 아들, 태율(4세)이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수도권 소재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어려서부터) 직업적인 꿈은 (오히려)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로서 아들에게 '가장 (남겨)주고 싶은' 것으로 "정신적 안정성"을 꼽았다. 경제적으로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재정 여력이 없어) 못해준다는 죄책감이 들지 않을 정도"면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또 그게 다는 아니란 게 핵심이다.
"저희 때 부모님들은 아이랑 많은 시간을 놀아주진 못했지만, 휴가철 때는 아이와 교감하며 확실하게 안정감을 주셨던 기억이 있거든요. 지금도 30년 전에 여행 갔던 기억을 너무 행복하게 떠올리니까요. 아이에게 이런 기억이 '최대한' 많을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거죠.
아이 스스로 이 추억 하나하나를 생각하면서 자존감이 높(아지)고, 부모는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는 나무'로 여기게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육아는 연애와 비슷"…'더 나은' 양육 위해 '배우는' 아빠들
몸으로 부딪쳐 시행착오를 겪기 전부터 '어떻게 하면 아이를 더 잘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배움을 스스로 찾아 나선다는 것도 이들 아빠들의 특징이다. "애는 알아서 큰다"거나 "(육아는) 닥치면 다 하게 돼 있다"는 속 편한 말은 요즘 아빠들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다만, 거주지역은 물론 어린이집과 학교, 학원 등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맘카페' 등을 형성하는 엄마들과 달리, 아빠들은 육아 관련 정보를 공유할 커뮤니티나 역량을 강화할 기회가 흔치는 않다.
승남씨는 아이가 말이 트이고 자기생각을 할 줄 알게 되는 시기부터는 '맞춤형 육아'를 위한 교육이 아빠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는 "신생아 때는 정상범위 내에서 아이를 키우면 되는 것 같다. 서점에만 가도, 나온 지 20년도 넘은 책이 아직도 팔리지 않나"라며 "(어린이집에 다니는) 유아기 이후론 아이들 성향을 부모가 파악하지 못하면 (부모의 태도가) 아이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다. 지금도 아동심리 등 관련 책을 많이 보고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아내가 '엄마라서' 더 잘 알 거라 지레짐작하지도 않는다. 승남씨는 "아내도 (엄마가) 처음이잖나. 모르는 건 거의 똑같이 모른다고 본다. 같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아이가 어떻게 자라면 심리발달이 잘 이뤄지고 창의력이 높아지는지 등의 관심사를 찾아보다 보면 결국엔 교육이 필요한 것 같더라"고 밝혔다.
진환씨도 주변의 '육아고수'들로부터 소위 '꿀팁'을 받는 것과 자신이 아이와 라포(rapport·상호 신뢰관계)를 쌓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봤다. "약간 연애하는 것과 비슷한 거예요. 연애를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 옆에서 코칭을 해준다 해도 (각각) 다른 이성의 성격과 성향, 두 사람이 만나서 발생하는 대화들이 다 다르거든요. 오은영 박사님도 영상을 보고 솔루션은 주시지만 (제한적) 상황만 보고 그걸 (100%) 명확하게 판단해줄 순 없잖아요."
그가 '아빠하이'에서 만난 아빠들을 독려해 자조모임을 꾸리거나, 인구보건복지협회에서 진행된 '파더링(fathering)' 교육에 참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진환씨는 "'아이가 이 부분은 나와 잘 맞는구나', '이래서 이때 내가 화가 났구나' 등을 돌아보게 되고, 더 좋은 건 다른 아빠들의 케이스를 다수 듣게 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본 보도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