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2002년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 월드컵. 6월 29일 한국은 튀르키예와 3위 결정전을 치렀다.
시작은 허무했다. 당시 주장을 맡았던 홍명보가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자마자 실수를 범해 11초 만에 상대 공격수 하칸 쉬퀴르에게 선제골을 헌납했다.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반 7분 상대 진영 오른쪽 측면에서 송종국이 돌파하다 상대 태클에 걸려 넘어졌고 주심은 프리킥을 선언했다. 좋은 위치에서 주어진 절호의 프리킥 찬스. 날카로운 왼발을 자랑하는 이을용과 신예 이천수가 공 앞에 섰다.
주심의 휘슬 소리가 들리자 이을용은 성큼성큼 공 쪽으로 다가가더니 절묘한 왼발 슈팅을 선보였다. 공은 그대로 상대 골문 좌측 상단에 꽂혔다. 동점 골이었다.
이을용은 이 대회에서 여러 포지션을 오가며 감초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마음고생도 있었다. 조별리그 2차전 미국전에서 페널티킥 키커로 나섰지만 성공시키지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 골로 이을용은 부담을 조금이나마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7월 28일. 이을용은 첫째 아들을 얻었다. 날카로운 왼발 킥 능력을 쏙 빼닮은 아들은 22년 뒤 태극마크까지 달게 된다.
풀백 이태석(포항 스틸러스)이 그 주인공이다. 이태석은 4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홍명보 감독이 발표한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5, 6차전 26인 국가대표 명단에 포함됐다.
이로써 우리나라에서 부자(父子)가 차례로 축구 대표팀에 발탁된 3번째 사례가 됐다. 1950~1960년대에 국가대표로 37경기를 뛴 김찬기 전 청소년대표팀 감독과 1980년대 태극마크를 달았던 아들 김석원이 역대 1호 국가대표 부자다. 2호는 1970~1980년대 한국 축구 최고 스타 차범근 전 국가대표팀 감독과 2002·2010년 월드컵을 뛴 차두리 부자다.
홍명보 감독은 이태석 발탁 이유에 대해 "계속 관찰할 필요가 있는 선수"라고 밝혔다. 홍 감독은 "시즌 중 팀을 옮기고, 다른 포지션을 맡느라 어려움이 있었다"면서도 "FC서울전에서 원래 포지션에서 뛰었고 편안한 경기력을 선보였다"고 전했다.
현재 대표팀 왼쪽 풀백 자리는 확실한 주인이 없는 상태다. 해당 포지션에 최근 이명재가 주전으로 뛰고는 있지만 붙박이라고는 볼 수 없다.
홍 감독도 "그 포지션을 항상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태석은 전형적인 풀백 스타일의 선수다. 그런 면에서 향후 미래를 위해서라도 계속 관찰할 필요가 있는 선수"라고 덧붙였다.
또 이태석이 연령별 대표팀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렸던 점도 주목했다. 홍 감독은 "꾸준히 연령별 대표팀에 왔다"며 "이제 성인 무대에 들어섰기 때문에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태석은 연령별 대표팀에서 14경기를 소화했다. 특히 올해 4월 열린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아시안컵에서는 자신의 강점인 왼발 크로스로 3경기 연속 어시스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포항 구단을 통해 이태석은 "포항에 와서 데뷔 골도 넣고 100경기도 달성했다"며 "국가대표로도 뽑혀 기쁘다. 좋은 일이 계속 생기는데 이 팀과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고 기쁜 마음을 전했다. 이어 "첫 발탁인 만큼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덧붙였다.
출전 명단에도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대표팀은 오는 14일에는 5차전 쿠웨이트 원정 경기를, 19일에는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과 6차전을 치른다. 이태석이 한 경기라도 출전한다면 김찬기-김석원, 차범근-차두리 부자에 이어 A매치를 뛴 부자로 아버지와 함께 한국 축구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