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주의
자신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사랑 앞에 그건 '멜로'가 아니라 '우정'이라 말하는 수안. 그런 수안이 내뱉은 우정이란 단어 속에 숨겨진 복잡미묘한 감정을 그저 보는 순간 이해하게 만드는 힘. 이를 만들어 낸 게 바로 배우 한해인이다.
한해인은 '폭설'(감독 윤수익)에서 하이틴 스타 설이(한소희)와 운명처럼 가까워졌지만,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해서 엇갈렸던 배우 지망생 수안을 연기했다.
윤수익 감독은 한해인의 연기를 두고 "수안의 눈빛에서부터 느껴지는 강렬한 힘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라고 말했다. 감독의 말마따나 수안은 한해인이 있었기에 수안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폭설처럼 한꺼번에 수많은 감정이 자신 안에 휘몰아치며 설이와 어긋나지만, 차가우면서도 포근한, 그러면서도 겨울을 담아낼 수 있는 한 단어인 '눈'과 같은 것이 수안의 사랑이었다. 이를 한해인은 자신 안에 담아내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렇기에 영화 속 수안을 보면 설이를 향한 감정이 오롯이 다가온다. 그리고 그런 수안을 보노라면 자신의 안에서 눈과 겨울이 어떻게 사랑과 맞물려 새삼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만날 수 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만난 한해인은 '폭설'을 통해 겨울이라는 계절이 자신 안에서 더 넓은 의미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춥고 시리지만, 그 안에 되게 뜨거운 게 있는 계절"임을 알게 된 것이다.
수안이 억압을 깨고 나오기까지
강릉의 예술 고등학교를 다니는 열아홉 배우 지망생 수안은 어느 날 폭설처럼 갑자기 다가온 아역배우 출신 스타 설이를 만나 서로 마음을 나누며 특별한 존재가 되지만 사소한 오해로 멀어지게 된다. 어느덧 어른이 되어 어엿한 배우가 된 수안은 설이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에 겨울 바다로 돌아가서 기억 속 설이를 다시 찾아 나선다.
한해인은 이러한 내용의 '폭설' 시나리오를 처음 읽은 후 "영화의 인물들이 가진 정서가 자연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아름답다"라고 느꼈다. 또 "두 사람이 세상에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이 연결된" 모습 역시 자신을 강하게 이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해인이 본 '폭설'은 인물의 힘이 큰 작품이었다. 어딘가 억압된 듯하면서도 주체적인, 연약한 듯 강인한 인물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수안이 겪은 감정에 관해 "설이라는 인물을 통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수안이 설이를 통해 느끼는 감정이 너무나 다양한 색깔이고 깊어서 수안이가 정의 내리기 어려운 감정이었다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설이가 수안에게 확고하게 자신의 감정은 '멜로영화'라고 할 때 수안은 '우정영화'라며 선을 긋는다. 멜로라고 하기엔 설이를 향한 마음 안에는 사랑뿐 아니라 여러 감정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수안은 배우가 된 후에도 불안해하고 방황한다. 그리고 비로소 어린 시절의 설이를 이해하고, 설이에 대한 감정 역시 선명해진진다.
한해인은 "배우로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고, 연기하고 있긴 한데 진정으로 원하는지 모르겠고, 계속 자기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무의식적으로 수안에게 쌓였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어 "어쩌면 스스로 그 억압을 쌓아왔을지도 모른다"라며 "그러한 내면의 상황을 강하게 느껴져야지만, 그걸 깨고 싶고 나가고 싶은 용기가 생기지 않나. 결국 자기 자신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싶다"라고 했다.
설이 그리고 한소희
영화는 수안과 설이의 감정과 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무엇보다 신인배우 한소희의 풋풋했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폭설'은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다.
한해인은 촬영하면서 한소희가 눈앞에 설이로서 존재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다시금 느꼈던 순간으로 세 번째 챕터 '바다' 속 한 장면을 들었다. 성인이 된 수안이 설이가 사는 카라반을 찾는 장면이다. 수안이 노크를 하자 어딘지 지친 듯 힘들어 보이는 설이가 문을 열고 나와 수안에게 왜 이렇게 자신을 찾아오냐고 말한다.
"소희씨가 뱉었던 그 대사에서 정말 많은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이게 설이와 수안이의 관계를 너무나 잘 담고 있는 말이라고 느꼈거든요. 그 대사를 했을 때, 그 순간이었던 거 같아요."
한소희가 영화에 합류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날, 운명의 장난처럼 눈이 내렸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을 안고 나간 리허설에서 한소희를 처음 만났다. 한해인은 그때를 두고 "한소희 배우의 눈빛과 감정이 훅 들어와 눈물이 왈칵 날 정도"였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배우 한소희가 가진 인상은 강렬했다.
촬영 중에도 수안과 설이처럼, 한소희와 어딘가 다르지만 진실하게 통하는 이상한 시너지를 느꼈다. 이러한 시너지를 가지고 '폭설'의 엔딩까지 달려 나갔다. 한해인은 "한소희 배우는 뭔가 거칠면서도 여린 면을 가졌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색깔이라든지 굉장히 오랜 시간 고민해 온 친구라는 걸 옆에서 가까이 보면서 많이 느꼈다"라고 떠올렸다.
배우 한해인의 길
'폭설' 속 어린 수안은 배우 지망생이다. 홀로 연습실에서 '햄릿'의 대사를 읊으며 자신의 꿈을 키워간 수안은 성인이 되어 그 꿈을 이룬다. 수안을 통해 어린 한해인을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극 중 배우 지망생이란 설정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한해인은 "나도 예고를 나왔고, 계속 연기에 대한 강한 꿈을 갖고 이 길을 걸어왔기에 그런 부분에서 많이 공감도 갔다"라고 했다.
한해인이 배우의 길에 접어든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중학생 때 우연히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들어간 연극반을 통해 진지하게 배우에 대한 꿈을 꾸게 됐다. 수안처럼 꿈을 이룬 한해인은 '너와 극장에서' '밤의 문이 열린다' '생각의 여름' '아워 미드나잇' '달이 지는 밤' '나의 피투성이 연인' 등 다양한 작품을 거치며 독립영화계 스타로 떠올랐다.
한해인 역시 수안처럼 배우로서 파고를 겪고, 이를 넘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그는 그 과정을 수안이 서핑을 배우고 바다에 들어가 파도를 헤쳐 나갈 때와 비슷하다고 했다.
한해인은 힘든 시간을 겪었음에도 배우의 길을 걷게 만드는 힘이 어디서 나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앞으로 배우로서 걸어나갈 수 있을까 자문한다면 그럴 것이라고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이야기했다. 다만 어린 해인과 지금의 해인의 발걸음에 담긴 의미는 조금 다르다.
그는 "어렸을 때는 날 펼쳐서 보여주고 싶은 에너지도 강했고, 그런 걸 너무 하고 싶었고, 거기서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라며 "그런데 요즘은 그런 열망이 더 이상 나한테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라고 고백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기반으로 배우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 나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한해인은 폭설 같은 대답을 전했다. 하나하나는 작고 금세 녹아내리지만, 쌓이고 쌓여서 단단해지듯이 말이다.
"나를 위해서,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기보다는 정말 낮은 곳에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아니면 이 일을 오래 하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다른 인물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누군가한테 행복을 주겠다고, 그럴듯한 사명감을 붙여서 하는 것도 거짓말인 거 같고요. 정말 낮은 곳에서 내가 다른 사람들의 모든 마음,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악한 마음부터 가장 선한 마음마저 다 품을 수 있는 마음으로 임해야지 않을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