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 합니까. 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 놓았읍니다."
1984년 9월 19일, 휠체어를 타던 고(故) 김순석씨가 서울시장을 향해 남긴 유서입니다. 이 절박한 문장들에는 도무지 장애인의 접근권을 보장해주지 않는 국가에 대한 원망이 애타게 묻어납니다.
그 후로 꼬박 40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흐른 만큼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국가에 대한 장애인들의 원망도 조금은 사그라들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아니었습니다. 장애인들은 지난 23일 대법원에서 장애인 접근권 보장에 소극적인 정부의 모습을 보며 또 한번 국가를 원망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법정B컷은 그날의 대법정으로 가보겠습니다.
장애인들은 편의점도, 사진관도 갈 수 없었다
지난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에 장애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은 2층에 있는 대법정에 쉽사리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법원은 휠체어 리프트를 설치해 장애인들의 입정을 도왔습니다. 그렇게 수십 명의 장애인들이 대법정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장애인 김명학씨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차별 구제 소송 공개변론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의 접근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가 장애인들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하는지를 다투는 변론이었습니다.
1998년부터 시행된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등편의법)의 시행령은 당초 편의점 등 소규모 소매점은 바닥면적 합계 300㎡ 이상일 때만 경사로와 같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닥면적이 300㎡를 넘는 편의점은 전국 편의점의 약 1.8%(2019년 기준)에 불과해, 사실상 대부분의 편의점에는 장애인 편의시설이 설치되지 않아 시행령이 무용지물로 전락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2018년 지체장애인 김씨 등은 장애인의 접근권이 침해됐다며 국가가 당사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며 이번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1, 2심 재판부는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한다"고 봤지만, 국가배상책임은 없다고 판단했죠.(불행 중 다행일까요. 1심 판결 이후 2022년에 편의시설 설치의무 기준이 바닥면적 50㎡ 이상으로 강화되긴 했습니다.)
이날 변론의 쟁점은 △국가가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에 대한 개정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위법한지(행정입법 부작위의 위법성) 여부 △국가배상책임의 성립 여부 등 두 가지였습니다.
변론에 나선 원고(장애인 등) 측은 국가가 헌법상 기본권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원고 측 대리인은 "전국에 바닥면적 합계 300㎡에 이르는 소매점은 거의 없다. 실제 원고 장애인 김명학씨는 1층에 편의점이 있어도 턱이 있어 이용할 수 없다"며 "결국 장애인등편의법은 (장애인의 편의를 증진시키겠다는) 입법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원고 측 참고인으로 나온 배융호씨도 휠체어를 타고 발언대에 나와 답답함을 호소했습니다.
2024.10.23. 대법원 전원합의체 차별 구제 소송 공개변론 中 |
배융호 : 얼마 전에도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는데 30분을 헤매다가 단 한 곳도 찾지 못해서 점심을 굶었습니다. 또 며칠 전 지인을 만나 카페 들어가려 했지만 1시간 동안 헤맸습니다. 이런 적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머리를 깎으려 해도 이용원에 갈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여권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에 가려했지만, 갈 수 없어 포기하고 제가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만들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소매점을 이용할 수 없어서 장애인들의 일상생활이 어렵습니다. 장애인등편의법은 장애인들의 접근권을 보장하고 편의를 증진하기 위해 제정됐지만, 제정 취지에 맞지 않아 수많은 소매점들이 의무 대상에서 제외된 결과 장애인의 일상생활이 어렵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법관님들께서 (정부의) 행정입법 부작위의 위법성을 확인해주시고, 휠체어 사용자들이 헤매도 되지 않도록, 반복되지 않도록 책임을 물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그러면서 원고 측은 "10cm의 단차가 누군가에겐 거대한 장벽이 된다. 이 사건은 제도에 의한 차별이자 행정 입법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이라며 "행정부가 무려 24년간 장애인의 접근권을 형해화(形骸化) 시킨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달라. 법원은 사회적 약자의 최후 보루"라고 말했습니다.
정부는 항변했고, 대법관들은 일갈했다
장애인들은 절절하게 호소했지만, 돌아온 정부의 대답은 너무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정부는 '해명'에 급급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우리도 노력했다'는 겁니다.
2024.10.23. 대법원 전원합의체 차별 구제 소송 공개변론 中 |
피고 측 대리인(정부법무공단 변호사) : 장애인 접근권 확보를 위한 여러 정책 시행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024년까지 장애인등편의법이 87차례나 개정되었습니다. 또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인증제도도 시행됐습니다. 또 장애인 접근권 강화를 위한 법률이 시행됐는데 중요한 것으로 활동보조를 지원하는 것, 예를 들어 구매를 요청하거나 직접 이동하는 데 보조를 받거나 할 수 있는 법률도 시행됐습니다. 보건복지부 장애인 예산이 1년에 총 5조원인데 그중 50%가 이 활동보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과 같이 부족하나마 정부는 장애인 접근권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사건 쟁점 규정(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과 관련해서는 헌법 및 법령에 따른 작위 의무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부작위가 인정되더라도 위법성을 인정하긴 어렵다는 말입니다. |
요약하자면 '우리도 할 만큼 했다'는 건데요. 정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장애인의 접근권은 '대체 가능한 권리'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2024.10.23. 대법원 전원합의체 차별 구제 소송 공개변론 中 |
피고 측 대리인(정부법무공단 변호사) : 소매점 접근권만 보더라도 다른 권리에 대해서도 대체수단이 많다는 특성, 그리고 이 대상이 영세업자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그런 특성이 있습니다. 대체수단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직접적으로는 소매점을 이용하기보다는 온라인을 통해 (물건을) 구매할 수 있고, 장애인 편의시설이 상당히 갖춰진 대형마트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간접적으로는 장애인들이 소매점을 방문하되 활동보조사를 통해 대신 구매하거나 이동을 같이 해서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처럼 소매점 접근권에 대해서는 대체수단이 많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
이에 주심인 이숙연 대법관이 의문을 표했지만, 정부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2024.10.23. 대법원 전원합의체 차별 구제 소송 공개변론 中 |
이숙연 대법관 : 피고 측 대리인, 장애인의 소매점 이용은 일상생활 영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피고 측 대리인 : 중요하고 인정되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점점 (소매점 이용) 권리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개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매점 접근권에 대해서는 다른 권리에 비해서 대체수단이 많습니다. |
더이상 지켜만 보고는 없었던 걸까요. 오경미 대법관이 정부 측에 일침을 가합니다.
2024.10.23. 대법원 전원합의체 차별 구제 소송 공개변론 中 |
오경미 대법관 : 제가 보기에도 (이동권 확대를 위한 정부의) 많은 노력은 인정됩니다. 하지만 이동만 시켜주면 뭐합니까? 들어가질 못하는데요. 이런 측면에서 접근권과 그 다음으로 사람을 대면하는 행위에서의 차별을 금지하자는 게 차별금지법의 목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피고 측에서 그것을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권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조금 놀랐습니다. 그 말은 장애인에게 집에만 있으면서 온라인으로 (구매를) 하라는 것이고, 그때그때 필요한 카페나 편의점 등 즉자적인 일상생활, 일상생활의 즉자성을 전혀 구현하지 못하고, 미리미리 계획해서 활동보조인을 불러서 마트나 가라는 것은 쉽게 말할 수 없는 부분 같습니다. |
조희대 대법원장도 장애인 편의시설이 있는 편의점이 5%도 안되는 부분을 지적하며 "법에서 요구하는 시설물에 대해서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를) 50% 이상이라도 해야 할 바를 다 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50%나 70%면 모르겠는데 3%나 5% (설치한 것을) 가지고 서로 주장하는 정도라면, 입법 의무를 게을리한 게 숫자 자체로 명확하지 않냐"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미국은 정부가 나섰다 "장애인 차별, 300만 달러 배상"
장애인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 끝에 이뤄진 이날 변론에서 이러한 정부의 답변, 정부의 태도가 과연 '최선'이었을까요. 외국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나라는 장애인이 자신을 위해 싸워야만 하죠.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경제적, 정신적 비용을 들여 소송을 어렵게 제기해도 권리를 지킬까 말까 합니다.
반면 미국은 달랐습니다. 정부가 직접,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라고 소송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지난 2016년 미국 법무부는 미국의 최대 고속버스 운영사인 '그레이하운드'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레이하운드가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버스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장애인 편의시설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자, 법무부가 직접 장애인들을 대신해 그레이하운드를 상대로 "장애인 접근권, 이동권을 보장하지 않아 미국장애인법(ADA)을 위반했으니 손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건 겁니다.
소송 끝에 장애인들은 승리했습니다. 2100여 명의 장애인들에게 총 300만 달러(한화 약 41억원)의 배상금이 지급됐습니다.
2019.5.2 미국 법무부 공식 보도자료 中 |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여행하거나 여행을 시도하는 동안 장애 차별을 경험한 2100명 이상의 개인에게 총 296만 6천달러를 지급했습니다. 이 지급은 미국 최대 시외버스 운송 제공업체인 그레이하운드가 장애인 승객에게 완전하고 평등한 운송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미국장애인법(ADA)을 위반하는 전국적인 패턴 또는 관행에 가담했다는 법무부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2016년부터 광범위한 합의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법무부는 교통 서비스에서 장애에 기반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총체적 개혁을 통해 장애인들에게 동등한 여행 기회를 보장할 것입니다. |
미 법무부는 배상금을 지급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그레이하운드와 △미국장애인법 준수 관리자 고용 △모든 직원에게 장애인 관련 교육 실시 △장애인이 온라인 예약과 장애 관련 요청을 할 수 있는 시스템 구비 △3개월마다 규정 준수 노력에 대한 정부 보고 등의 내용을 담은 합의까지 맺었습니다.
미국 법무부와는 너무도 상반된 우리 정부, 대법관들까지 일갈할 정도로 뻔뻔했던 정부의 태도에 그날 장애인들은 40년 전 김순석씨가 느꼈던 원망과 답답함을 또다시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장애인들은 아직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기본권을 되찾을 그날을 꿈꾸며 희망을 품습니다. 공개변론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원고 김명학씨가 느꼈다고 말한 그 '희망'에, 대법원이 응당한 선고로 화답하길 바랄 뿐입니다.
"저는 오늘 대법원 공개 변론에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인 권리의 무게를 대법원이 잘 느끼고 있기에, 이렇게 공개적인 변론을 결정했다고 생각합니다. 1층이 있는 삶을 함께 만들어 주십시오.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는 저에게 1층은 그냥 1층이 아닙니다. 편의점, 약국, 음식점, 등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이용해야 하는 시설들이 저에게는 '금지된 구역'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응당 누려야 할 권리를 반드시 찾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김명학 노들장애인야학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