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장애인의 접근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가 장애인들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하는지를 두고 공개변론을 열었다. 장애인들은 "편의점, 음식점, 카페, 약국 등 대부분 소매점을 이용하기 어려워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반면, 정부 측은 "부족하나마 정부도 최선을 다 하고 있고 위법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맞섰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대법정에서 김모씨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차별 구제 소송 공개변론을 진행했다. 대법원이 전합 사건의 공개 변론을 진행한 것은 2021년 이후 3년 만이다. 이날 변론을 보기 위해 수십 명의 장애인들이 대법정을 찾았고, 대법원은 휠체어 리프트를 설치해 이들의 이동을 돕기도 했다.
1998년부터 시행된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등편의법)'의 시행령은 당초 편의점 등 소규모 소매점은 바닥면적 합계 300㎡ 이상일 때만 경사로와 같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면적이 300㎡를 넘는 편의점은 전국 편의점의 약 1.8%(2019년 기준)에 불과해, 사실상 대부분의 편의점에는 장애인 편의시설이 설치되지 않아 시행령이 무용지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이에 2018년 지체장애인 김모씨와 유아차를 이용하는 A씨 등 3명은 장애인의 접근권이 침해됐다며 국가가 당사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며 이번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1, 2심 재판부는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한다"고 봤지만, 국가배상책임은 없다고 판단했다.
이날 변론의 쟁점은 △국가가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에 대한 개정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위법한지(행정입법 부작위의 위법성) 여부 △국가배상책임의 성립 여부 등 두 가지였다.
이날 원고 측은 "휠체어는 잘못이 없다"며 "(장애인이 편의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국가의 잘못이라는 점을 이 소송을 통해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원고 측 대리인은 "전국에 바닥면적 합계 300㎡에 이르는 소매점은 거의 없다. 실제 원고 김씨는 1층에 편의점이 있어도 턱이 있어 이용할 수 없다"며 "결국 장애인등편의법은 (장애인의 편의를 증진시키겠다는) 입법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헌법상 기본권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0cm의 단차가 누군가에겐 거대한 장벽이 된다. 이 사건은 제도에 의한 차별이자 행정 입법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이라며 "행정부가 무려 24년간 장애인의 접근권을 형해화(形骸化) 시킨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달라. 법원은 사회적 약자의 최후 보루"라고 덧붙였다.
원고 측 참고인으로 나온 환경건축연구원 배융호 이사 또한 "얼마 전에도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는데 30분을 헤매다가 단 한 곳도 찾지 못해서 점심을 굶었다"며 "최근에는 여권 사진을 찍으려 사진관에 가려 했지만 갈 수 없어 포기하고 내가 직접 스마트폰으로 찍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일상생활에서 가야 하는 음식점, 카페, 약국, 슈퍼마켓 등 대부분 소매점은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통해 이용할 수 없다"며 "장애인들의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정부 측 대리인은 "원고들이 지적하는 기간에 정부는 장애인 접근권 확보를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장애인등편의법은 2024년까지 87차례 개정됐다"며 "정부는 부족하나마 장애인 접근권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정부의 작위 의무 인정은 어렵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소매점 접근권은 다른 권리에 비해 대체수단이 많다"며 "소매점을 이용하기보다 장애인들이 온라인을 통해 구매하거나 장애인 편의시설이 상당히 갖춰진 대형마트를 이용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피고 측 참고인으로 나온 안병하 강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편의점에 대한 장애인들의 접근권 침해로 인해 어떤 손해가 발생했는지 주장과 증명이 없다"며 "위자료 받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손해가 발생했음이 인정돼야 하는데, 원고들은 피해의 증명이 전혀 증명되지 않은 채 감정에만 호소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대법관들은 "대체 가능한 권리"이며 "최선을 다했다"는 정부 측 주장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오경미 대법관은 "(정부 측이 장애인 접근권을)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권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조금 놀랐다"며 "그 말은 즉 장애인에게 집에만 있으면서 온라인으로 하라는 것이고, 그때그때 필요한 카페나 편의점을 가는 등 일상생활의 즉자성을 전혀 구현하지 못하고, 미리미리 계획해서 활동보조인을 불러서 마트나 가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희대 대법원장도 "법에서 요구하는 시설물에 대해서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를) 50% 이상이라도 해야 할 바를 다 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50%나 70%면 모르겠는데 3%나 5% (설치한 것을) 가지고 서로 주장하는 정도라면, 입법 의무를 게을리한 게 숫자 자체로 명확하지 않냐"고 일침을 가했다.
이날 공개변론을 마무리하면서 조 대법원장은 "오늘 심리 내용과 제출된 자료들을 참작해 신중하게 결론을 내리겠다"며 "선고기일은 추후 결정해 통지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