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랐죠."
박찬욱 감독이 빵 터졌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옆에 있던 김상만 감독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영화 '전,란'에서 왜군 겐신(정성일)의 말을 깨알같이 통역한 장면은 작품 속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김상만 감독도 "이렇게까지 웃을 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통역 장면은 많은 고민을 통해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각본을 쓴 박찬욱 감독이 현실감을 중요시 여겼기에 통역하는 장면은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김 감독은 "시나리오대로 통역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재미가 없으니 통역하는 과정을 잘 만들어보자고 했다"며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와 약간 당황했다"고 웃었다.
김 감독만이 보여준 연출…'춘향뎐', '서편제' 오마주
영화 '전,란'을 연출한 김 감독의 이력은 남다르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포스터 디자이너로 시작해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기생충 등 다양한 작품의 포스터를 선보이며 미술감독에 이어 음악감독, 영화감독까지 섭렵했다.
이 때문에 영화 '전,란'에는 그만의 손길이 잘 담겨 있다. 뚜렷한 색감과 아웃포커싱 기법이 곳곳에 드러난다.
이 가운데 일부 장면은 임권택 감독의 작품을 오마주했다고 한다. 영화 초반 노비들의 분업화를 설명한 판소리 장면과 백성들이 쾌지나칭칭나네를 부르는 모습이다.
김 감독은 "각본을 보는 순간,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춘향뎐'이 생각났다"며 "물을 건너는 장면에서는 물길의 길이에 맞춰 카메라 방법을 구사하는 등 음악과 화면이 완전 일치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는 "쾌지나칭칭나네 부르는 장면의 경우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서편제'를 오마주한 것"이라며 "서편제에서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평화롭던 롱테이크 장면을 총소리와 함께 깨지는 그림으로 만들고 싶었다. 오마주와 변혁으로 봐주시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 감독은 장소 선택도 중요시 여겼다. 특히 순천 의병 주둔지를 담은 장면은 산 중턱에 있고 경사도 있어 촬영하는 데 만만치 않은 장소였다. 배우 김신록도 "너무도 아름다웠지만, 필연적으로 화장실이 없어 차를 타고 내려가야만 했다"고 떠올렸다.
김 감독은 "올라갔다 내려오면 진이 다 빠질 정도였던 공간이었지만, 풍경이 너무 좋았다"며 "우리 말고 아무도 찍을 사람이 없을 거 같아 제가 좀 고집을 피워 제작진을 설득했다"고 웃었다.
"사실 해무 넣게 된 배경은…" "김신록, 범동 더 깊게 해석"
영화 후반부 해무와 함께 펼쳐지는 종려, 천영, 겐신의 화려한 액션 장면과 관련 김 감독은 해무를 넣을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조수간만의 차로 해변의 모습을 똑같이 담아내기 어려웠다"며 "실제로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4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바람이 너무 불어 옆에 있는 사람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이어 "서로의 감정이 중요하게 부딪혀야 하는데 더 감정적인 표현을 고민하다 해무 설정이 나오게 된 것"이라며 "어디서 칼이 날아올지 모르는 긴장감과 홀로 남겨졌을 때의 외로움과 불안을 주고 싶었다. 또 종려와 천영의 7년을 쌓아온 감정이 풀리는 걸 해무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김 감독의 의도대로 해당 장면은 잘 표현됐다고 한다. 배우 박정민도 기대 이상으로 잘 나와 만족스러워했다고 전했다.
김 감독은 캐스팅 비화도 전했다. 사실 제작진도 강동원이 너무 잘 생겨서 천영 역을 맡아도 될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 '침착맨' 이말년(이병건) 작가의 웹툰 '조선쌍놈' 작품을 접한 김 감독이 "그 웹툰을 너무 재미있게 봐서 생각나더라"며 "이런 아이러니함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신록이 연기한 범동 캐릭터도 설명했다. 김 감독은 "사실 남자역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어 "지옥에서 김신록 배우가 연기하는 걸 보고 다음 작품에 꼭 함께하고 싶었다"며 "역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라. 그러다 범동 역을 제안해보면 완전히 다른 느낌이 올 거 같았다"고 떠올렸다.
김 감독의 촉은 정확했다. 김신록이 범동이라는 인물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서다. 그는 "대사 하나 바꾸지 않았다"며 "7년이라는 전란 속 천민 출신의 범동이 몸으로 부딪혀 경험한 통찰 같은 게 필요했는데 더 깊게 표현했더라"고 덧붙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대사·모습도 보는 묘미
당초 영화의 시작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구상됐다고 한다. 당시 왜군을 관군으로 받아들여 민란을 제압한다는 내용이 조선왕조록에 적혀 있었는데, 이를 두고 사관이 이례적으로 어처구니없다는 사견을 남겼다. 이 내용이 시나리오의 출발점 중에 하나였단다.
이 때문에 영화 곳곳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대사 또는 장면을 그대로 옮기기도 했다.
김 감독은 "피난길 당시 중전(의인왕후)이 마차에서 떨어질 때도 차승원이 내뱉은 말, 식사를 준비하다 폭도들의 습격으로 세자가 맨밥을 먹었던 일화도 실록에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끝으로 김 감독은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계급'을 거듭 언급했다.
"과거처럼 딱 정해놓은 계급은 없지만, 여전히 사회적인 권력 또는 경제적인 권력의 계층화가 있는 게 사실이잖아요. 흔히 금수저, 흙수저와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라고 생각해요. 더욱이 '나는 흙수저야'라고 하는 사고 방식이 (이미 많은 사람들 사이에) 내재화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서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재점검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라며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라고 질문을 한 번 던져주시면 참 감사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1일 공개된 영화 '전,란'은 공개 3일 만에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영화(비영어) 부문 3위를 달성했다. 한국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프랑스 △포르투갈 △브라질 △일본 등 총 58개 국가에서 톱10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