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이 쏟아지자 잠정 유보된 '디딤돌 대출 축소 조치'는 정부 차원의 공고도 없이 전격 추진됐다. 배경에 고질적 가계부채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지만, 수천만원이 절실한 서민들에게 혼란을 안겼다. 정부가 조치의 전면 철회에는 선을 긋는 만큼, 논란이 이어질 전망이다.
18일 국토교통부는 디딤돌 대출의 수탁은행들에 대해 '한도 축소' 조치를 잠정 유보하라고 요청했다. 앞서 은행들은 오는 21일부터 △자금보증 제한 △최우선변제 보증금 공제(방공제) 적용 △후취담보대출 금지를 시행한다고 고객들에게 통지했다. 이게 미뤄진 것이다.
정부 설명에 따르면 "대출 취급기관이 21일자로 갑자기 시행하면 혼란이 있을 수 있어, 관련 논의가 정리될 때까지 잠정 유보한 것"(국토부 관계자)이다. 오는 24일 예정된 국토부 종합 국정감사 전에는 논란을 정리하겠다는 방침이다. 조치의 강행, 유예 연장, 철회 여부가 다음주에는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LTV 축소, 방공제로 수천만원…대출한도 대폭 축소
당초 계획대로라면 21일부터 디딤돌 대출자들은 수천만원씩 급전을 조달해야 한다. 서민들의 내집마련 계획이 틀어지게 된다.디딤돌 대출은 2014년부터 실시된 정부지원 주택담보대출이다. 부부합산 연소득 6천만원(생애최초 및 2자녀 이상 7천만원, 신혼 8500만원) 이하 가구 무주택 서민이 5억원(신혼·2자녀 이상 6억원) 이하 가격의 주택을 살 때 빌릴 수 있다. 최대 2억5천만원(생애최초 3억원, 신혼·2자녀 이상 4억원) 대출된다.
유보된 대출한도 축소 조치로는 생애최초 주택 구입자의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을 70%로 낮추게 된다. 기존에는 LTV 70%에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보증해주는 10%를 추가해 80%였는데, HUG 보증이 중단되는 것이다. 생애최초가 아니라면 LTV 변화가 없다.
또 대출한도를 따질 때 방공제가 준수된다. 방공제는 대출자가 대상 주택을 전월세로 내놓을 경우 세입자에게 최우선적으로 보장해줄 보증금을 미리 떼는 공제다. 지역마다 금액 차이가 있고, 서울은 5500만원이다.
생애 처음 서울에서 4억원짜리 집을 사는 서민이 기존에는 LTV 80%로 최대 3억2천만원까지 대출받을 수 있었으나, 조치 이후에는 2억2500만원이 최대 대출한도다. LTV 축소로 4천만원, 방공제로 5500만원 각각 줄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취담보대출 금지에 따라, 신축아파트 입주예정자는 완공을 앞두고 잔금대출을 아예 못받을 수 있다. 후취담보대출은 아파트 완공 전 먼저 대출한 뒤 소유권 등기 뒤 담보로 잡는 방식의 대출이다.
재원의 한계…'가계대출 억제' 정책 기조도 감안
정부는 한정된 재원으로 최대한 많은 서민들에게 정책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주택도시기금을 기반으로 하는 디딤돌 대출은 올해 대출 목표액 55조원 가운데 벌써 40조원 이상을 집행한 것으로 전해졌다.국토부 관계자는 "그동안 방공제 미적용이나 후취담보대출 등으로 규정된 한도보다 더 많이 대출되는 관행이 문제였다"며 "국민 돈으로 조성된 재원인 만큼, 대출 시행규모에는 한계가 있다. 최대한 많은 서민들에게 정책혜택이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디딤돌 대출 등 정책대출이 가계대출 증가 억제를 사실상 방해하는 점도 당국의 고민거리였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달 은행 자체의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은 4조원으로 8월 증가액(6조4천억원)보다 크게 둔화됐다. 반면 디딤돌 대출 등 정책대출의 증가액은 8월 3조9천억원, 지난달 3조8천억원으로 제자리 걸음이었다.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2단계 시행 등 가계부채 억제에 정책 역량을 집중한 정부로서는 무시하기 어려운 금융동향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추가 대출 급증 등 가계부채를 관리하는 것도 고려한 게 맞다"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도 "지금 정부는 말 그대로 전방위적으로 가계대출 관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는 92.1%로 경제규모 30위권 국가 중 5위를 기록했다.
서민들에게 알리지도, 준비 기다리지도 않는 정부
하지만 정부의 공식 발표가 없었던 데다, 조치 시행이 유예기간 없이 전격적으로 단행된 데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실수요자들의 비판은 물론 국회로부터도 지적이 나왔다.지난 16일 HUG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진석 의원은 "이 조치가 공문도 없이, 국토부 전화 한통으로 이뤄진 것이 맞느냐"고 질의해 "맞다"는 답을 들었다. 문 의원은 "정부가 서민정책을 이렇게 해도 되느냐. 유예기간을 둬야지, 구멍가게도 이렇게 운영하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또 "무주택 서민의 중저가 주택마련과 전세자금 지원을 위해 정책성 대출의 급격한 축소는 하지 않겠다"던 최근 김병환 금융위원장의 국정감사 답변에 이번 조치가 배치되는 점도 지적된다. 정부 부처간 조율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잠정 유보는 길지 않을 전망이다. 국토부 종합 국정감사가 예정된 24일까지 관련논의를 마무리하고, 시행 유보는 최소화한다는 게 국토부 방침이다.
전면 철회 역시 없다는 게 국토부의 입장이다. 국토부는 설명자료를 내고 "디딤돌대출 축소조치 중단, 전면 유예 및 철회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조속한 시일 내에 관계기관 협의를 거쳐 실수요자들의 불편이 최소화되도록 보완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진석 의원은 조치의 철회를 촉구했다. 그는 "국토부가 사전고지도 없이 서민의 동아줄인 디딤돌 대출을 규제하려 한다. '대출 대상이나 한도를 줄인 것이 아니니 대출 규제가 아니다'라는 정부의 주장은 말장난"이라며 "서민들의 더 큰 피해를 막으려면 유예를 넘어 전면 철회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