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내달 2일부터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지원사업' 참여를 희망하는 병원들의 신청을 접수받아 준비가 된 의료기관부터 시범사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중증·응급·희귀질환 치료에 집중해야 할 대형병원이 경증환자 쏠림에 대응하느라 인력·자원을 허비해온 패턴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겠다는 것이다.
3년간 단계적으로 중증진료 비중을 현 50%에서 70%로 끌어올리고 일반병상을 수도권 중심으로 최대 15% 감축하겠다는 목표 지표도 내놨다. 품은 배로 드는데 행위별 수가제에서 '홀대'받아 온 필수의료의 수가 인상 등에 연간 3조 3천억씩 2027년까지 총 10조 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한다.
상급종합병원 기능 정상화를 통해 환자 중증도와 병원 종별에 부합한 진료체계를 구현하겠다는 방향성에는 의료계도 대체로 공감하는 모양새다. 근로자와 피수련생이란 '이중 지위'를 지닌 전공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목표도 바람직하다는 평가다.
하지만 의료공백 8개월째를 앞두고 집권여당이 띄운 '여·야·의·정 협의체'가 좌초하고 있는 가운데 시범사업이 온전히 굴러갈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않다. 또 큰 틀의 청사진에 동의한다 해도, 미래 전문의인 전공의·의대생이 부재한 상황을 보완할 세부대책은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고육책'인 비상진료, 대형병원 경증환자 감소에 일부 효과
앞서 상급병원 의사인력 '10명 중 4명' 이상을 차지해온 전공의 1만 2천여 명은 정부의 의대증원에 반발해 대부분이 수련병원을 이탈했다. 이들의 '과로'를 토대로 유지돼온 상급종합병원들은 진료 규모를 축소했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비상경영에 들어갔다. 해당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환자에 대해서조차 후속진료를 타 병원에서 받으라고 권유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에 수도권 5대 대형병원(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 등은 중증도가 높은 환자 위주로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됐는데, 이 상황이 역설적으로 기형적인 의료전달체계를 일부 개선하는 효과를 냈다. 비응급·경증환자의 응급실 내원 비율이 낮아진 것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 3~7월 응급진료 현황을 분석한 결과, 권역 및 지역응급의료센터를 찾은 중등도 미만 경증환자는 지난해 동기간 대비 46.6%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약 109만 명→58만 3천 명). 중증환자의 내원 규모도 19만 5천 명에서 18만 3천 명으로 6% 가량 줄었다.
특히 '의료대란'의 분수령으로 여겨졌던 추석 연휴를 당국이 "큰 탈 없이 넘겼다"고 자평할 수 있었던 데엔 연휴기간에 한해 응급의료 관련 수가 가산을 적용한 대책 등이 부분적으로 유효했던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정부는 △응급실 전문의 진찰료 가산·응급센터 내원 후 24시간 중증응급 수술 가산 등 1500억 원 △24시간 진료지원 7300억 원 등 해당 수가지원을 이번 시범사업에도 반영하고 정식 제도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다만, 현재까지의 '선방'은 경증환자의 대형병원 응급실 내원 시 본인부담 인상 조치에 더해 국민들이 스스로 의료 이용을 자제한 영향이 크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전공의 부재는 그대론데 '숙련인력 중심 개편'?
무엇보다 현장 잔여인력의 여력이 한계치에 달했다는 측면에서, "숙련된 인력 중심의 병원별 효율적 운영"을 강조하는 정책이 공허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전공의가 돌아올 거란 희망 하나로 버텨온 의대 교수 등은 현재의 전공의 부재가 내년에도 '상수'로 이어지는 이상, 전문의·간호사 등 팀 진료를 강화하겠다는 당국의 발언이 무의미한 수사에 불과하다고 본다.
수도권 소재 상급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교수 A씨는 "지난 7개월간 우리가 깨달은 사실은 이게 '저(低)임금 고(高)노동'을 감내해온 전공의 없이 운영 불가한 (의료)시스템이란 것"이라며 "어떻게 해서든 전공의가 돌아오는 게 가장 큰 이슈가 돼버린 이유가 뭐겠나. 그 자체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은 안 보인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의협)도 정부 사업계획을 두고 "그럴듯하지만 현실감이 없다. 단기간에 시범사업 실행을 설계한 탓인지 실제 의료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의협은 "특히 정부가 촉발한 의료대란 사태로 의료현장을 떠난 전공의들이 복귀하지 않은 상황에서 당장 내년 전문의 배출에 대한 해결책도 없이 상급병원을 전문의와 진료지원(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 중심으로 만든단 것은 근본적 기능을 망각한 채 정부 스스로가 졸속 시범사업임을 방증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전문의 외 전공의의 대체인력으로 활용해온 PA 간호사는 지난달 말 간호법의 국회 통과로 내년 6월부터 합법화된다. 다만, 현장에선 PA 제도화에 찬성하는 의사들조차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며 후폭풍을 우려하고 있다. 이들이 감당할 진료지원 업무의 구체적 기준·내용, 교육 절차 등은 복지부령으로 정해야 하는데, 이 내용은 아직 '공란'인 탓이다.
앞으로 시범사업에 참여할 대형병원이 '비용 이슈'로 인해, PA 간호사 채용을 전공의 비중 감축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현실적 염려도 있다.
보건의료노조도 이에 대해 "정부의 상급병원 구조전환(안)을 살펴보면, '의사의 업무'를 가장 핵심적인 혁신과제로 담고 있을 뿐 다른 보건의료인력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며 "현 상태에서 상급병원 중증진료 비율을 확대하면 일반병동의 인력은 급격히 PA인력과 중환자실 등으로의 이동이 불가피하다"고 언급했다.
보다 통합적인 관점에서 직종별 적정인력 기준을 마련하고 의사인력 외의 보건의료인력 확충 및 처우개선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는 취지다. 아울러 상급종합병원의 과부하를 낮추기 위한 진료협력 병원과의 '전문 의뢰·회송'을 현실화하려면 1·2차 병원의 의료 질 제고가 병행돼야 하나, 관련 대책 또한 부실하다는 지적이다.
의정갈등 방치한 채 '실효성 있는' 추진 어려울 듯
건보재정 과(過)투입의 적정성에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의대 증원에 찬성하는 입장인 참여연대는 전날 '건보 재정은 정권의 화수분이 아니다'란 성명을 내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급병원의 위기는 급작스러운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인한 재난상황이며, 명확한 정책 실패의 산물"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부가 말한 전공의 복귀 및 전문의 충원·전달체계 개편이 이뤄진다면 이는 일시적 위기인 만큼 건보재정이 아니라 국회 동의를 얻어 일반예산에서 집행해야 하는 것"이라며 "급조된 정책은 준비없는 2천 명 증원의 파국과 비슷한 위기만 부추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정부가 지역 1차의료·공공의료 지원에는 눈감으며 '대형병원 살리기'에만 열중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진짜' 의료개혁을 추진하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