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밤이었다. 부모와 형, 삼촌 등 산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은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러고는 해가 뜨기 무섭게 다시 깊은 산 속으로 달아나기를 반복했다.
6·25 한국전쟁 때 자행된 경기 김포지역 민간인 학살사건의 유족회 대표인 정금모 회장 얘기다. 그는 아버지가 총에 맞아 숨지고 한 달 뒤 태어났다. 주변 전언으로 기억하고 있는 당시 상황들은 직접 겪은 것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북한과 맞붙은 김포는 전쟁 사나흘 만에 북한군에 둘러싸였고, 총칼을 앞세워 '밥 해오라', '전쟁터에 나가라'는 겁박이 이어졌다. 하지만 주민들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런 주민들은 인천상륙작전 등의 성공으로 국군이 다시 일부 영토를 되찾으면서, 오히려 더 큰 비극을 맞아야 했다. 적에게 부역한 '빨갱이'로 몰렸기 때문이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경찰서 유치장이나 방공호에 갇혔고, 자백을 요구하는 고문에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민들은 마을 곳곳 언덕으로 줄지어 끌려갔고, 산 속에서는 요란하게 총성이 울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가해자는 적군도 아닌, 경찰 지휘를 받던 치안대. 공권력은 반공을 위해서라면 평범한 국민들에게조차 가혹했고, 주민들은 서로를 반목하며 둘로 갈라졌다.
정 회장 가족 역시 북한군 지시에 따랐다는 이유로 좌익세력이 됐고, 그 낙인은 '연좌죄'의 덫에 걸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27일 정 회장은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여우골에서 총소리가 많이 들렸다고 하는데, 산꼭대기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가족들이) 숨어 있었다고 들었다"며 "경험하지 않았어도 내겐 악몽 같은 현실이나 다름없다"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포 민간인 학살의 진상, '윗선은 공권력'…"사과해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의 잇단 진실규명 결정으로 한국전쟁 발발 직후 김포지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 2기 진실화해위는 제87차 회의에서 '김포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해 진실규명(희생자 8명)을 결정했다. 이로써 1기 진실화해위를 거쳐 지난해 8월 진실규명까지 합쳐, 지금까지 해당 사건의 희생자로 공식 확인된 인원은 모두 146명으로 늘었다.
이 사건은 1950년 9월~10월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 등으로 경찰 또는 치안대에 끌려간 민간인들이 김포군 하성지서, 양곡지서, 쌀창고 등에 감금돼 고문을 받다 인근 산지에서 집단으로 희생된 내용이다. 유족들이 추산한 희생자 규모는 2천 명에 이른다.
2022년 11월 2기 진실화해위에서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신청을 받았을 때 김포와 강화지역 사건이 가장 많았는데, 이는 북한 개성 등지와 가까워 전쟁 직후 지리적으로 가장 빠르게 영향을 받은 탓으로 풀이된다. 희생자들의 거주지는 당시 김포군 검단면, 김포면, 월곶면, 하성면 등지였다.
또한 여느 지방의 경우 보도연맹 등에 연루돼 집단학살이 발생한 반면, 순식간에 점령된 수도권에서는 상당수 북한군에 부역한 혐의로 억울한 죽음을 맞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이번 진실화해위 조사의 핵심도 희생자의 사망 시점이 김포지역에서 우리 군이 적군을 몰아내고 수복한 직후였느냐를 가리는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조사관들은 제적등본, 족보, 1기 진실화해위 기록 등을 종합 분석하고 신청인과 참고인 진술 조사를 병행해 8명의 희생 사실을 추가로 확인했다.
가해 주체는 김포경찰의 지휘를 받던 치안대로 파악됐다. 치안대는 여우재 고개, 군하리 고무래골, 하성면 태산 골짜기 등지에서 다수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치안대는 정식 경찰이 아닌 일반인으로 구성된 우익단체로 알려졌다. 공권력의 지시 또는 비호 아래 한 동네 이웃들로부터 학살을 당했다는 얘기다.
진실화해위는 적법 절차의 원칙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진실규명 결정문에는 "전쟁 중이더라도 경찰 지휘를 받는 치안대가 비무장 민간인들을 법적 근거와 사법 절차 없이 살해한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적혔다.
이와 관련한 진실화해위의 권고사항은 "국가가 희생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피해 및 명예 회복 조치, 위령사업 지원, 평화·인권 교육의 강화 등을 통해 국민 화해와 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진실화해위는 희생자 유해 발굴과 추모사업 등 후속 조치에 관해서는 관할 지자체인 김포시에도 정식 권고할 방침이다.
앞서 김포시는 2022년 5월 예산 6600만 원을 들여 관련 위령제를 개최하고 유해 발굴에 나서 8구(신체 일부분 기준)와 유품(고무신, 탄피, 단추 등) 34점 등을 수습해 세종시 추모의집에 임시 안치한 바 있다.
김포시 관계자는 "원래는 국비 지원 대상 사업인데 선정이 되지 않아 시 예산으로 진행했다"며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에 따라 권고사항들이 넘어오면, 시에서 할 수 있는 역할들을 검토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충분한 추모 절차…고령의 유족들에겐 배보상"
유족 측은 너무 늦은 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도 "사필귀정"이라는 반응이다.
역사 속에 묻혔던 학살의 진상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만큼, 고인들의 넋을 제대로 달래고 얼마 남지 않은 고령의 유족들에겐 적절한 사후 조치가 필요하다는 게 이들의 마지막 바람이다.
정 회장은 "세월이 너무 흘러 현장을 목격했던 분들은 대부분 사망해 남은 유족도 얼마 안 된다"면서 "그래도 빨갱이로 살아온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내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게 돼 다행이다"라고 의미를 뒀다.
이어 "노후대책이라도 마련할 수 있게 진실규명 결정을 근거로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국가의 배보상이 조속히 이뤄지길 바란다"며 "소송 절차와 비용 없이 피해 보전을 받을 수 있는 특별법 제정을 위해 4년간 국회에서 싸웠는데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연좌죄로 유족들 중에는 공직 취업이 막히거나 신원 조회에 대한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이 많다"며 "이념이 뭔지도 모르는 민간인들이 빨갱이로 낙인 찍혀 평생을 고통받고 살았던 것이다"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웃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서로를 밀고해 사지로 몰아넣는 참혹함을 겪어야 했다"며 "아픔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유족회에 남은 인원은 30명 정도이며, 80여 명(접수건 기준)의 희생자에 대한 진실화해위 조사가 남아 있다. 다만 출생신고나 사망기록이 늦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던 데다, 집성촌들은 도시개발로 사라져 참고인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등 조사에 어려움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