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손현주는 여러 인간 군상들을 자유자재로 붙였다 떼는 힘을 가졌다. 어찌 보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형편없는 불륜남이었다가, 또 어떤 작품에서는 한없이 평범한 서민이 되고, 이번 지니 TV 오리지널 '유어 아너'에서는 아들의 뺑소니 살인 사건을 숨기는 엘리트 판사 송판호가 됐다.
어느 작품 하나 편한 적은 없지만 손현주에게 '유어 아너'는 유독 힘들었다. 촬영이 1년 가까이 밀려 애타게 기다린 작품이기도 하고, 이 드라마를 촬영하며 형제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인내와 슬픔 그리고 고통의 시간 속에서 탄생한 드라마이다보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손현주는 '더 고생해야 될 것 같다'는 매니저의 조언을 진심으로 존중한다. 장난처럼 외모 이야기를 꺼내지만, 그처럼 가족물에서 스릴러물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춘 중년 남성 배우가 흔하지 않다. 어떤 배역, 어떤 연기가 주어져도 손현주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호흡마저 연기로 만드는 재능을 가졌다. 그 성실함과 충실함이 지금의 손현주를 쌓아 올렸다.
다음은 간담회 형식으로 진행된 손현주와의 인터뷰 일문일답.
Q ENA 채널에서 방송하면서 5%대 시청률이 나오는 등 반응이 좋았다
A 이 작품이 사실 작년에 촬영을 했었어야 했다. 제가 대본을 처음 받은 시기가 재작년 말이었다. 여러 요인들 때문에 좀 늦어져서 작년에 작품을 한 게 없다. 그 당시 (김)명민씨와 통화를 많이 했다. '어떻게 할 거냐. 기다려야지' 그러면서. 명민씨도 1년을 기다렸을 거다. 어렵게 나온 드라마다. 제가 나온 드라마는 항상 어렵더라. 이번에도 못하지 않을까 했는데 안심이 되는 마음이다.
Q 워낙 연기력 좋은 두 배우가 만나서 화제도 뜨거웠다. 김강헌 역의 김명민과는 아버지 대 아버지로 대립각을 세웠는데 호흡은 어땠나
A 김명민과는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잘 만났다. 이미 '베토벤 바이러스' 때부터 꼭 만나고 싶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순신 역도 했던 친구다. 당시에는 인지도가 없어서 빼앗겼지만. (웃음) 한 번 더 이순신을 하면 이순신 역을 제가 하고 김명민이 원균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소중한 인연이 한 명 더 늘었다. 다시 꼭 만나고 싶고, 좋아하는 동생이다. 우리는 현장에서 대결을 펼치는 게 아니라 같이 갔다. 딱딱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너무나 부드럽고 여린 사람이다. 드라마 밖에선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연기를 할 때는 두려움과 무서움을 끌어 올리면서 디테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Q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고생이 심한 역할이었다. 선택에 있어서도 신중했을텐데
A 제 매니저가 저와 10년 이상이 됐고, 그냥 동반자다. 저에게 고생하는 역할을 하면 사람들이 보고 좋아할 거라고 하더라. 오늘 오면서도 '더 고생을 해야 된다'고 했다. (웃음) 이런 역할을 한 지가 10년이 좀 넘었다. 드라마 '추적자 THE CHASER'가 고생을 많이 했고, 저에게 들어오는 드라마, 영화도 쉬운 것들이 별로 없었다. '얼마나 고생스럽겠느냐' 해서 '유아 아너'에 들어갔는데 심적,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힘든 만큼 보람도 있었다. 처음 본 배우들을 많이 만났는데 성실하게 다들 자리매김을 잘 하더라.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역할이니까 주어지는 게, 제 운명이고 숙명이라면 끝까지 받아들일 생각이다.
Q 원작 소설이나 미국 드라마에서의 캐릭터와는 다른 해석이 들어갔나
A 원작을 보지는 못했는데 굉장히 아버지가 부드럽게 나왔나 보더라. 대한민국 정서상 그렇게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부드럽게 가는 것도 아버지이지만, 내 아들을 감추기 위해서 매달릴 수밖에 없는 아버지니까 아들이 밉기도 할 거다. 내 방식대로의 연기를 해보자고 생각해서 끌고 갔다. 심리적 표현이 많고 힘드니까 육체가 힘들었다. 그 와중에 딸은 미국에, 아들은 군대 가서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대본이 더 안 보였다. 전형적인 클리셰를 만들면 정답식의 스릴러처럼 나올 거 같아서 싫었다. 어떻게 잘 숨길지, 표현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Q 촬영을 하면서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는지 궁금하다
A 촬영을 연천에서 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많이 촬영했는데 더 힘들게 (친)형이 (하늘로) 갔다. 당시 저는 연천에 있었다. 형도 기자였기 때문에 여기 계신 분들이 남 같지 않다. 형이 제 사진을 찍고, 취재도 하고 그랬다. 지병도 없었던 형인데 갑자기 가니까…. 촬영을 끝내지 못하고 발인까지 한 다음에 바로 다시 촬영에 합류했다. 여러 마음이 교차되면서 절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형 생각이 많이 난다. 아마 잘 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제가 1990년에 방송에 들어왔을 때부터 형은 제 팬이었다. 절 유달리 아껴주던 형이 가버려서 가슴이 아프다. 형에게 '유어 아너'를 어떻게 봤는지 물어보고 싶다. 나 역시 멀지 않았다. 하늘에 올라가면 같이 사진 찍고 물어볼 수 있을 거다.
Q 아들의 뺑소니 살인 사건을 감추려는 아버지의 처절한 몸부림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심리 표현을 할 수 있었는지
A 실제로 그 상황이 무서웠다. 무서워서 죽을 거 같은 마음으로 임했다. 송판호가 김강헌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질리도록 무서우면서 겁이 나는 심리가 바탕에 깔려있어야 된다고 봤다. 또 이걸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두려우면 두렵고, 무서우면 무섭고, 나가기 싫어도 끌려나갈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저지른 범죄 안에서 나를 숨겨야 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시청자들에게 주고 싶었다. (송판호가 선택한 길은) 잘못된 길이니까 당연히 처절하게 무너지는 게 맞다. 눈을 깜빡이면 감정이 흩어질 거 같아서 충혈될 때가 많았다. 배우는 호흡이 없으면 죽어 있는 것과 똑같다. 호흡으로 상황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현장의 감정보다는 그 전에 일으킨 감정들에 집중했다.
Q '유어 아너'가 어두운 분위기의 스릴러물이지만 사실 손현주하면 평범한 '보통 사람' 캐릭터가 먼저 떠오르기도 한다
A '추적자 THE CHASER' 이후로 행복한 드라마를 많이 했던 거 같다. 그런 드라마를 하면 눈이 맑아지고, 몸이 많이 풀어진다. 배우가 그런 주기가 있나 보다. 하고 싶지 않아도 그런 작품들이 자꾸 들어왔다. 소시민 캐릭터를 많이 했는데 아마 요즘 MZ 친구들은 제가 코미디를 한 걸 모를 수도 있다. 이젠 그런 작품을 할 때도 됐다. 제 나름의 방식대로 웃음을 드리고 싶다. 요즘은 또 무거운 작품들을 하다 보니 대통령, 국세청장 등 직업은 다양한데 결말은 편치 않다.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 고난과 고통을 많이 주는 걸 수도 있다. (웃음) 배우로 살아남기가 힘들어서 소위 목숨을 걸어야 된다.
Q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만큼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겠다
A 저는 걷는 거 밖에 없다. 골프를 하고 싶어도 필드에 나가본 적이 없다. 산을 좋아해서 1주일이고, 2주일이고 걸으러 갈 생각이다. 머리를 편하고 시원하게 하기 위해서 걷다가 올 거다. 생각은 잠시 지워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