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박정희의 관계…저항과 탄압의 18년

비운의 정치인으로 죽을 고비 여러차례 넘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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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DJ·86)과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의 관계는 ''저항과 탄압''이란 말로 요약된다.

두 사람 다 거의 비슷한 시기 한국 정치사에 등장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 체제에서 최대 정적이었고 이로인해 끊임없이 탄압을 받아야 했다.

투옥과 연금, 그리고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리는 탄압……. 김대중과 박정희, 이들의 관계는 ''악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DJ가 정치권에 본격 등장한 것은 1961년 5월 13일 치러진 인제 재보궐 선거에서 민의원에 당선되면서다. 1954년 목포 민의원 선거 이후 3번의 고배를 마신 끝에 비로소 국회에 입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의원선서 조차 못하는, 비운의 정치인이 되고 만다. 당선 3일 뒤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5.16 쿠데타를 감행하고 18일 국회를 해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10년 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숙명적 대결로 맞붙었다.

김영삼 후보를 이기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된 DJ는 줄곧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허용하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없는 총통 시대가 올 것''''이라며 분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 DJ는 539만표를 얻어 634만표를 얻은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대신 그는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돼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데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DJ는 교통사고로 골반을 크게 다쳤다. 교통사고를 가장한 테러로 알려진 이 사고로 그는 평생 불편한 걸음걸이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급기야 그의 ''경고'' 처럼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DJ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망명, 유신 반대 투쟁에 돌입했다.

도쿄에서는 유신 반대 첫 성명이 발표되고 워싱턴에서도 국민투표 무효선언이 발표됐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공작정치로 일컬어지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1973년 8월 8일 DJ는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당시 일본을 찾은 양일동 통일당 당수와 김경인 의원을 만난 뒤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납치됐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지고 팔, 다리에는 무거운 추가 달린 채 현해탄에서 수장될 뻔한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일본 해상자위대의 추격 등으로 그는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한국으로 강제 귀국됐다.

이 사건은 한일간 외교 갈등으로 비화됐지만 진상이 밝혀지기 까지는 무려 34년이 더 걸렸다.

2007년 10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상규명 위원회는 이 사건은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고 사건 이후 중앙정보부가 조직적으로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고 밝혔다.

특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최소한 묵시적 승인이 있었다고 밝혔다. 구사일생 목숨은 구했지만 이후에도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귀국 직후 자택 연금으로 정치활동이 금지 당한데 이어 1976년 재야 민주 지도자들과 명동 3.1 민주 구국 선언을 주도했다가 구속되는 등 가택연금과 투옥을 반복했다.

그러다 1979년 10.26이 발생, DJ와 박정희 대통령간의 저항과 탄압의 악연은 18년만에 끝이 났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나고 2004년 8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DJ에게 "아버지 시절 여러가지 피해를 입으셨다"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에 대해 DJ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박 대표의 사과에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아다"고 회상했다.

김대중과 박정희, 이 두 전직 대통령은 살아 생전 어떤 화해나 용서도 하지 못했다. 다만 산자와 죽은자의 간접 화해가 이를 대신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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