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형제복지원 사건' 또 있었다…사과·피해회복 시급

연합뉴스

부랑인 수용시설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제2의 형제복지원들의 실상이 37년 만에 드러났다. 66살 이영철씨(가명)의 기구한 운명은 앳된 나이에 예고없이 찾아왔다.
 
1973년 가을, 당시 15세이던 이씨는 대구역 대합실에 앉아있다가 대구시청 직원 2명의 부름을 받고 탑차에 태워졌다. 영문도 모른 채 도착한 곳은 대구시립희망원. 입소 이후 서울시립갱생원, 충남 천성원 등지로 옮겨다니며 20여년간 강제수용 생활을 계속했다. 감금,폭행,강제노역 생활에서 풀려난 때는 1998년. 국가권력이 그를 풀어준 곳은 조치원역, 손에는 70만원이 쥐어져 있었다.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서울시립갱생원, 대구시립희망원, 충남 천성원, 경기 성혜원에 수용돼 있던 수용자 윤모 씨 등 신청인 13명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고 9일 밝혔다.
 
이들 4개 시설은 1975년 내부무훈령 제410호, 1981년 구걸행위자보호대책, 1987년 보건사회부훈령 제523호 등 부산 형제복지원과 동일한 정책을 근거로 운영되던 곳이었으나, 형제복지원이 1987년 인권침해 폭로로 검찰수사를 받았던 것과 달리 어떠한 조사도 받지 않고 이름을 바꿔가며 운영됐다. 형제복지원과 마찬가지로 이들 시설에서도 구타와 가혹행위가 만연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의 실상이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유린 행위였음은 입소 과정에서부터 드러난다. 수용자들은 경찰과 공무원 합동 단속반이 '사회정화'라는 명목으로 행한 불법적인 단속에 의해 연행된 뒤 민간 법인에서 위탁 운영하는 이른바 부랑자 수용시설에 강제로 입소됐다. 영장에 의한 체포나 구금 등 법치주의는 철저히 무시됐다.
 
수용소 생활은 한국판 아우슈비츠, 혹은 한국판 아오지 탄광과 다름없었다. 휴일도 없이 매일 무급노동에 시달리며 다른 수용시설 건설현장에 동원됐다. 서울시립갱생원 수용자들은 국가주도의 국토개발사업에도 강제동원돼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나 서울대교(현 마포대교) 보수 공사 현장에 투입되기도 했다.
 
벌칙으로 독방에 감금되거나 구타를 당하는 인권침해 피해도 잇따랐다. 삼청교육대 방식의 특수교육을 받다가 중대장에게 구타를 당해 수용자가 닷새 만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가해자는 폭행치사가 아닌 전치 1주의 상해혐의로만 기소돼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시립갱생원은 1980년 수용자 추정인원 1천명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262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을 정도로 강제노역과 가혹행위는 심각했다. 천성원 산하 성지원에서 1982년부터 10년간 인근 의대에 보내진 해부실습용 시신은 해당 의과대학이 인수한 전체 시신 161구의 무려 72.7%에 이를 정도다. 여성이 시설에서 출산하면 친권 포기를 강요당해 당일이나 이튿날 신생아를 입양알선기관에 보내는 인권유린도 자행됐다.
 
과거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김모씨는 13살이던 1981년 고모집으로 가던 중 길을 잃어 파출소에 갔다가 '돈을 벌고 싶냐, 공부를 하고 싶냐'는 경찰의 질문에 '돈을 벌고 싶다'고 답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형제복지원에 보내졌다고 진술했다. 근무평점과 복지원이 제공하는 뒷돈도 경찰 등 국가기관의 인권유린을 부추겼다는 방증이다. 1977년 중앙정보부는 당시 형제복지원 불법 감금폭행 사건과 관련해 내사에 착수했으면서도 "부산 시내 부랑인을 수용해 선도함으로써 범죄예방과 건전한 시가를 형성하는데 이바지했다"며 오히려 두둔하고 묵인한 사실도 확인됐었다.
 
국가폭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 침해사건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반드시 상응하는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진실화해위에 의해 37년만에 제2,제3의 형제복지원 사건이 드러난 만큼 국가는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피해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에 나서야 한다. 또한 이번에 비록 신청인 13명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지만 정부는 추가로 확인되는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활동을 제도화하고, 피해자들의 개별 구제신청 없이도 적절한 보상과 재활 서비스, 트라우마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즉각 후속 방안을 마련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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