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열린 국민의힘 한동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간 회담은 마치 여야가 바뀐 듯 공격과 수비가 엇갈렸다. 야당인 이 대표가 해병대 채 상병 특검법과 전국민 25만원 지원금 특별법 등에서 전향적인 수용 입장을 내비쳤으나, 여당인 한 대표가 동의하지 않아 합의가 불발됐다.
하지만 이 대표가 의제로 요구했던 '의료 대란'은 회담 직전까지만 해도 공식 의제에 포함돼 있지 않았음에도 실제로는 논의됐다는 점 등을 살펴보면, 양당 대표들의 당 내 입지 차이가 협상력에도 유의미한 영향을 줬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모두발언부터 드러난 여야 대표 간 '공수교대'
이날 열린 회담은 모두발언에서부터 '공수(攻守)교대'를 연상케 했다. 한 대표는 민주당 회의실의 슬로건 '새로운 민주당, 다시 뛰는 대한민국'과 국민의힘 회의실 슬로건 '차이는 좁히고, 기회는 넓히고'를 언급하며 "과거 전통적인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양당의 슬로건이 서로 바뀐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그는 "저는 '격차해소'를 말하고, 이 대표님이 '성장'을 말한다"며 "국민의힘과 민주당 모두 전통적인 지점을 확장하여 상대를 향해 움직이려는 노력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이 대표는 전 국민에게 25만원의 소비 쿠폰을 지급하는 민생회복지원금 지급 특별조치법에 대해서 여당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는 모두발언에서 "굳이 차등 지원, 선별 지원을 하겠다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며 "적정선에서 협의해서 지원하자"고 타협점을 제시했다.
통상적으로 여당이 정책을 추진하면 야당이 반대하는 모습이 일반적인데 이 경우 한 대표가 야당의 정책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거대 야당 대표인 이 대표가 여당의 절충안을 수용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모양새다.
다만 실제 회담에선 의견차가 컸다. 민주당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회담 뒤 기자들과 만나 "한 대표가 '현금 살포'는 어렵다는 논리로 이야기했다"며 "이 대표는 경제·재정 정책이라며 그 논리는 조금 옹색한 것 아니냐고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국민의힘 곽규택 수석대변인도 "논의는 됐는데 양당 대표의 입장 차를 줄이지 못했다"며 "우리는 선별적인 부분에 주안점을, 민주당은 상품권을 통한 일률적인 25만원 지원을 말씀하셨다.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고 전했다.
채택된 의제는 무엇?…'주도권' 누가 쥐었던 건가
회담 전에는 양당이 조율한 공식 의제에서 '의료 대란' 문제가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논의가 이뤄져, "추석 연휴 응급의료체계 구축에 만전을 기할 것을 정부에 당부하고 국회 차원에서 대책을 협의하기로 한 점"이 결과 발표에 언급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모두발언에서 이 대표는 "참 안타깝다. 한 대표가 정부와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일정한 대안을 낸 것처럼, 국민 생명과 관련된 일이다"며 "손바닥으로 가리고 안 보려고 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실제 국민의 삶을 위협하는 사안이다"고 말했다.
그런데 회담이 끝난 뒤 이 의제는 정식으로 발표문에 포함됐다. 곽 수석대변인은 "양당 대표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며 "2025학년도 의대 증원에 대해서는 논의할 수 없다는 부분에 인식을 같이했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결과 발표문에 포함시켰다"고 설명했다. 조 수석대변인도 "의료 대란과 관련해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서 말씀드렸다"면서도 "많은 토론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합의는 만들지 못하고 국회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기로 논의했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이 대표가 제안했지만 실제 회담 직전까지 정식 의제에 포함되지 못한 '의료대란' 문제를, 본 회담에서 한 대표가 수용해 결과 발표문에도 포함시킨 셈이 됐다. 실제 토의 과정이 녹록치는 않았음을 시사하지만 이 대표가 회담의 주도권을 일정 부분 가져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민주당 지도부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양측 모두 추석 연휴 응급의료체계 마비 가능성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했다. 때문에 이를 결과 발표에 담는 데는 이견을 제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국회 차원의 대책 기구를 만들어 사태를 수습하자고 제안했는데, 이 부분이 합의가 되지 못한 데에는 (당정갈등에 얽혀 있는) 한 대표의 한계 또는 처지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현격한 협상력 차이…'일극 체제' 李 vs 당내 입지 불안한 韓
이 대표는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제3자 추천 특검을 하자고 하셨는데 저희가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씀드렸다"며 "조건을 하나 더 붙이셨는데 '증거 조작' 이것도 특검하자, 하시죠.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제3자(대법원장) 추천' 방식과 '증거 조작' 의혹 등의 전제 조건은 모두 한 대표가 내건 조건인데, 이 대표가 이 같은 요구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되받아치며 결단을 촉구한 셈이다.
다만 회담 과정에서 양당의 의견차가 커 합의사항으로 채택되진 않았다. 민주당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회담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대표가 본인의 의지는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면서도 "당 내 사정이 있고, 법안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씀한 거 같다"고 전했다. 그는 "의지가 있다는 것은 결국 구체적으로 법안 제출이라든지 하는 액션으로 나와야 한다"며 압박에 나서기도 했다.
이는 양당 대표가 가진 당내 입지와 협상력의 차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행보라는 평가다. 이 대표의 경우 '일극(一極) 체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권에 있어 확실한 입지를 점하고 있다. 반면 한 대표의 경우 아직 당 내부를 완전하게 장악했다 보기 어렵고, 현재는 의료 대란 등을 두고 '당정갈등'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양당 대표의 당내 입지 차이가 회담에서 주도권의 차이로도 드러났다는 평이다.
韓 "국회의원 면책특권 제한"에 맞받아친 李 "대통령 소추권도"
한편 이날 모두발언은 한 대표에 이어 이 대표가 발언을 하는 순서로 진행됐는데, 이 대표가 한 대표의 말에 '되받아치기'를 하는 듯한 장면도 눈길을 끌었다.한 대표는 이날 모두발언에서 "국민은 정치개혁을 원하고 있다"며 "특히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진영을 불문하고 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남용되고 있는 면책특권의 범위를 의정활동과의 연계가 적은 악의적 고의범의 경우 등에서는 법률로 제한하는 방안도 논의해야 한다"며 "과거 이 대표도 면책특권 제한의 필요성을 여러차례 제기하셨으니, 양당 대표의 생각이 같은 지금이 면책특권 제한 추진의 적기"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는 이 대표의 이른바 '사법 리스크'를 정조준한 것으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대표는 '정치개혁'이라는 어젠다 안에서 이를 또 다시 되받아치는 방식으로 반박했다. 그는 "국회의원의 특권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상응하는 대통령의 소추권에 대해서도 같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행정적 독재국가로 흘러갈 위험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에 계엄 이야기가 자꾸 이야기되고 있고 종전에 만들어졌던 계엄안에 보면 계엄 해제를 국회가 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국회의원들을 계엄 선포와 동시에 체포, 구금하겠다는 그러한 계획을 꾸몄다는 이야기도 있다"며 "완벽한 독재국가 아닌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가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계엄령 선포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정치 공세"라며 "있지도 않고, 정부가 하지도 않을 계엄령을 주장하는 것은 정치 공세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계엄령을 설사 하더라도 국회에서 바로 해제가 되는데 말이 안 되는 논리"라며 "지금 국회 구조를 보면 계엄령을 선포하더라도 바로 해제될 게 뻔하고 엄청난 역풍일 텐데 왜 하겠는가. 상식적이지 않다"고 강조했다.
힌편 이 대표가 이날 모두발언 가운데 '전 정권에 대한 정치 보복'을 언급한 점을 감안할 때, 이는 한 대표의 '국회의원 특권 제한'을 '대통령의 권한 제한'이라는 또 다른 명제로 받아치며 견제구를 던졌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