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 목사와 국민교육회 동지들

[이준 열사와 그 동지들④]

'대동역사략', 7권1책. 1906년 6월 대한국민교육회 발행. 이양재 제공
▶ 글 싣는 순서
①이준 열사, 기독교로 개종하다
②이준 열사, 서재필과 입헌정치·공화정 추구
③신앙 동지 김구와 전덕기 목사
게일 목사와 국민교육회 동지들
(계속)

이준은 일찍이 감리교 상동교회로 개종했지만, 그는 장로교 연동교회(蓮洞敎會)의 교인이기도 했다. 서울 연동지역은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선교사 모삼열(S. F. Moore)이 1894년부터 전도를 시작해 몇 명의 신자를 얻었고, 선교사 이길함(Graham Lee, 1861~1916)과 서상륜(1848~1926)이 연지동의 초가에서 예배를 시작한다. 차츰 교회가 조직화돼 1900년부터 1927년까지 캐나다 출신의 게일이 제1대 담임 목사로 시무를 한다.
 
게일은 1888년 12월에 내한해 부산 원산 등지에서 선교를 한 후 서울로 들어왔는데, 그는 1892년 성서 번역에 참여해 마태복음서와 에베소서 등 신약성서 중 일부를 번역했다. 1895년에는 존 변연의 'Pilgrim Progress(천로역정)'를 한글로 번역한 '텬로력뎡' 목판본 2책을 발행한다.
 
'텬로력뎡'은 우리나라에서 서양의 문학작품을 한글로 번역 출판한 최초의 책이다. 1897년 한국 최초의 '한영사전'을 간행하였으며, 또한 '춘향전' '구운몽' 등을 영역해 한국의 언어와 풍습 등을 세계에 널리 알린 당대의 한국학자였다. 영국의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간사를 역임하며 한국에 관한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이러한 게일의 전도에 의해 1904년 개혁파 정부 관리와 사대부 양반들이 연동교회로 개종하는데, 특히 이상재(1850~1927) 유성준(1860~1934) 이원긍(1849~?)을 비롯한 독립협회의 여러 지사들이 입교하게 된다. 당시 게일은 반상을 타파해 천민 출신 고찬익 조사를 투표를 통해 장로로 세우는 등 연동교회는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인간 평등과 민주주의 실현에 앞장섰다. 
 
독립협회의 여러 지사들이 장로교 연동교회로 입회하자 이준은 1904년부터 연동교회와 연관해 계몽사업을 하게 되는데, 당시 연동교회에는 민준호도 들어와 있었다. 이에 연동교회는 상동교회와 더불어 '대한국민교육회'의 태동지가 된다. 당시의 개화 자강파들은 1903년에 재조직된 '상동청년회(엡윗청년회)'와 같은 해 설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등 기독교 계열의 단체들을 중심으로 교육활동과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비정치적이며 교육을 전담할 단체 설립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1904년 8월 24일자로 이준, 이원긍, 전덕기(상동교회 목사), 유성준, 박정동, 최병헌(1858~1927)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국민교육회'(회장 이준)를 설립한다. 이들은 국민교육 구국운동을 목적으로 학교 설립과 교과서 편찬에 힘을 기울였고, 일제의 식민 교육 정책, 을사늑약, 고종의 강제 퇴위 등에 반대하였다. 당시 이준은 현채(1886~1925) 등 비기독교 개혁파 계몽주의자들까지도 '대한국민교육회'로 끌어들이는데 게일은 이러한 이준의 '대한국민교육회' 활동을 모두 보장한다. 
 
이준의 '대한국민교육회' 동지로서는 주목할 만한 기독교인은 여럿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독립협회와 개혁당(1902년, 비밀결사)을 함께 한 독립운동가이자 후일 YMCA 회장으로 청년운동을 한 월남 이상재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이해조(1869~1927)는 1905년(광무 9년) 7월 무렵에 연동교회로 개종하며 '대한국민교육회' 회원이 되고 1906년 11월부터 잡지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에 한문현토소설 '잠상태(岑上苔)'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이해조는 주로 양반가정 여인들의 구속적인 생활을 해방시키려는 의도로 실화에 근거해 사회계몽을 위한 신소설을 썼다. 또한 민준호는 동양서원을 설립하여 '신약성서' 전체의 주석서를 편찬 보급한다. 그러나 대한국민교육회는 1907년 6~7월의 헤이그특사 사건에 영향을 받아 그해 11월에 해산되고, 연이어 유길준(1856~1914)이 12월에 발기한 국내의 흥사단(興士團)으로 흡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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