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응급·의료 전선은 이상 없다'는 대통령실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에 진료 지연 안내문이 놓여 있다. 류영주 기자

대체 '의료대란'이란 무엇일까. 그 정의가 자못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언론은 '의료대란'을 무엇으로 규정할까. 하루에 수십명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삶을 달리하는 상황을 사람들이 직접 목도할 때 그것을 '의료대란'이라고 칭할까. 아니면 일부 병원의 응급실들이 기능을 상실하고 일상 상황이 되고 있는 '응급실 뺑뺑이'를 의료대란이라고 부를 수 없는걸까.
 
'의료대란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일은 '허상'과 같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2024년 8월 27일 현재, 대한민국 의료현실에 대해 국민들이 불안과 공포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남궁인 교수는 자신의 sns에서 "현재 내 업무는 응급 진료체계 붕괴의 상징이다. 나는 권역응급센터에서 혼자 근무한다. 여기는 하루 육십 명 정도를 진료하는 서울 한복판의 권역센터이다. 매 당직마다 의사는 나 혼자"라고 썼다. 이어 "한 달도 못 버틸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6개월이 넘었다. 이 붕괴는 확정되었다. 일말의 방법이 없다"고 탄식했다.
 
한 대학병원 외상외과 교수도 "응급실 환자가 옛날보다 줄었지만 우리도 환자 10명이 오면 5명은 튕겨보낸다"고 전했다. 이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경험과 일치한다. 그는 "응급실 22군데에 전화를 걸었지만, 119가 와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일으켜 겨우 옛날에 다니던 병원에 가서 신분을 밝히고 응급실에 갔는데 의사가 아무도 없었다"고 토로했다. 필자의 주변에서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들린다. 지난 7월 동네 의원에서 신장질환으로 종합병원 내방을 권유받았지만 대형병원 예약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한다. 진료 예약은 "내년에나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일곱 달 뒤인지, 열달 뒤인지 병원과 환자 본인도 알 수 없는 현실의 일이다.
 
요즘 지인들끼리 가장 많이 나누는 인사말이 "건강 조심하라"는 얘기들이다. 병원에 가고 싶어도 제때 진료받기 어려우니 '아프면 안된다'고. 허투루 하는 말들이 아니다. 무더위와 열대야가 심신을 녹아내리게 하지만, 바야흐로 벌초의 계절이 돌아왔다. 특히 다가올 추석 명절, '절대 아프면 안된다'는 이야기는 처음엔 '괴담'이라 생각했지만 절대 괴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됐다. 지난 주 고향에서 만난 지인은 "추석 명절에 벌초 작업은 절대 하지말라"고 당부했다. 예초기를 사용하다가 다치거나 벌집에 쏘이기라도 한다면 큰 일이라는 것이다. "걱정도 팔자"라 했지만, 그렇다고 노심초사라 치부하기엔 영 개운치 않았다. 의료대란이라는 것이 문 앞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목도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황진환 기자

날마다 상황이 비상해지고 있는지라. 여당과 야당도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의료 공백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통령실에 2026년 의대 정원 증원을 의료계와 재논의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당 대표가 전공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고 당 정책위원장과 최고위원도 의료계와 간담회를 가졌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의료대란 실태조사와 대응 방안 마련을 지시했다. 의료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랐지만 정부여당이 별다른 대책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윤창원 기자

그러나 키를 쥐고 있는 대통령실의 현실인식은 국민들의 걱정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민심청취를 위해 민정수석실까지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민심 청취 안테나는 화성(Mars)만 바라보는 것 같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라는 분의 멘트 하나하나가 마치 기계음과 같다. 이 당국자는 "①응급실 뺑뺑이는 의대 증원 문제가 불거지기 전부터 누적된 문제이며, ②기본적으로 의사 부족 문제가 깔려 있고, ③여기에 더해 경증 응급환자가 곧바로 상급병원에서 치료받는 것, ④지나치게 저수가여서 보상이 불충분한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고 했다. 그 언어가 염장을 지른다. 책상 앞에서 4가지 사유가 적힌 보고서를 받고 언론에 복붙처럼 전달하는 이 고위당국자에게 가슴과 심장이 붙어있는 사람인지 묻고 싶다.
 
의대 정원 2천명, 1500명 증원은 지고지순한 목표가 아니다. 증원을 통해 현재의 의료시스템을 개선하면 그 목표는 도달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의료개혁은 전투적이다. 그는 상대를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개혁할 힘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의료계를 굴복시킬 힘은 그에게 있을리 없다.
 
연합뉴스

대통령실이 진두지휘하는 의료개혁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는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1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등 연합군과 독일군은 벨기에 부근의 서부전선에서 치열한 참호전을 벌였다. 그 결과로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휴전협약이 체결됐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오만함과 고집만 앞세운 독일군 장군은 또 진격명령을 내린다.
 
영화는 마지막 자막을 내비친다. "(참호전)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와 독일, 양 진영의 서부 전선 위치는 0.5마일(0.8km) 이상 이동한 적이 없다."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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