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안에 비친 격랑의 '마지막 왕국' 조선…"잊혀진 인물들의 부활"[책볼래]

다니엘 튜더 장편 역사소설 '마지막 왕국'
5년간 의친왕 이강 일생 추적해 팩션으로 살려내
숨겨진 독립운동사 발굴…"김란사 재조명해주길"

영국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다니엘 튜더. 김영사 제공

대원군은 이양선을 향해 포를 날리며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나라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갔지만 조선보다 앞서 문을 열고 열강의 불평등을 경험한 일본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조선을 밟고 대륙 진출의 꿈을 꾸었다.

조선은 통상 수교 거부를 고집하다 결국 고종 13년인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하며 개항의 문을 열었다. 일본은 군사력을 동원해 앞서 경험한 불평등 조약을 밀어붙였다. 근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 본격화 하는 쐐기가 됐다.

앞서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제일 먼저 문호를 열었고,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의 무력시위로 개항을 선택했다.

문을 열고 보니 19세기 중반, 아시아는 격랑의 시간을 거치고 있었다.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무역 패권을 차지하려는 유럽 열강들의 싸움터가 극동의 조선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일본은 열강의 아시아 진출에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서둘러 조선과 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소설 '마지막 왕국'은 이 비극의 역사 한복판에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李堈)을 중심으로 여성의 사회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던, 독립운동사에 가려진 실존인물 김란사(金蘭史) 등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깊은 고민,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김영사 제공
 
저자인 다니엘 튜더는 영국 출생으로 2002년 친구를 따라 한국을 처음 방문한 뒤 한국의 매력에 빠져 한국과 외국 금융회사에서 일했다. 2010년 영국 유력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 특파원으로 한국을 다시 찾은 그는 한국의 정치·사회·경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관련 기사와 책을 썼다. 2017년에는 청와대 해외언론비서관실 정책자문위원을 맡았고, 2023년 임현주 MBC 아나운서와 결혼했다.

튜더 작가는 22일 복원 공사가 한창인 왕들의 어진을 모셨던 덕수궁 신원전터 옆 서울 정동1928아트센터에서 '마지막 왕국' 출간 기자간담회를 열고 5년에 걸친 자료조사와 집필을 거친 소설 출간의 소회를 밝혔다.

그는 "역사에서 잊혀진 인물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격랑의 시대에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야기들을 인간의 보편적 성장 스토리로 담아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10남인 이석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을 인터뷰하며 부친 이강(의친왕)의 행적과 서사,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격동기 조선을 배경으로 소설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특히 그의 눈길을 끈 것은 고종의 여러 자녀 중 이강이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든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이강은 왕의 아들이었지만 상궁이었던 귀인 장씨의 소생으로 어린 시절 궁 밖에서 자라야 했던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이자 파락호(몰락한 집안의 자제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인물)라는 세간의 이미지를 가진 동시에 성장을 통해 국가의 존재를 고민하고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좌절과 울분 속에서 때론 희망을 향하다가도 욕망에 비틀거린 그의 인간적 면모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설의 등장인물, 역사적 배경과 사건들은 사실과 각색, 허구를 넘나들며 장구한 팩션(faction) 스토리를 펼쳐낸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이강은 상궁 출신 귀인 장씨의 소생으로 왕권 밖으로 밀려 궁 밖에서 자라다 14세 무렵 환궁하지만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언더우드 선교사 집으로 피신했다가 이들 부부의 양아들인 김원식을 만난다. 김원식은 훗날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상해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을 각색한 인물이다. 이강은 미국 유학을 떠나지만 방탕한 생활에 빠져 지내다 당시 보기드문 여성 유학생 김란사(낸시 하)를 만나면서 조국의 앞날과 독립운동에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김원식과 김란사는 그가 후일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향하는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대한제국 육군 부장 예복을 착용한 의친왕 이강, 최초의 여성 미국 유학생이자 독립운동가 김란사

튜더 작가는 "600페이지가 넘는 역사 소설이지만 이강, 김란사 두 강인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통해 실패한 영웅의 여정, 성장 스토리, 역사의 참화 속에서 극복하고 했던 인물들이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튜더 작가를 곤혹스럽게 한 취재 기자들의 질문도 있었다.

최근 정부의 한일 관계 태도와 뉴라이트계 인사 문제로 사회·정치적 논란이 빚어지면서 당시 일제의 강압에 맞선 조선 황실과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낸 의미나 한국의 시대적 상황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냐를 묻는 질문들이었다.

그는 "외국인이자 제3자로서 (한국의)정치적 논쟁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다"며 "특별히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의도한 것은 없다. 역사에서 잊혀진 인물들을 소설을 통해 살려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다만 튜더 작가는 "역사 속에서 제대로 조명 되지 못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던 여성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 '김란사' 라는 인물이 이 소설을 계기로 재평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 책은 영미권 등 해외 출간도 추진 중이다. 최근 한국 문화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높은 가운데, 한국의 전통 문화가 생소한 외국인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겠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는 "원래 익숙한 영어로 쓴 뒤 한국어로 번역돼 출간된 것"이라며 "외국인 지인들에게 (영문)원고를 보여줬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고 말했다.

튜더 작가는 "최근 영국 런던에서 한식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퓨전 한식이 아니라 진짜 한식이 인기다. 소설을 쓰면서 영미권 독자들에게 어떻게 한국을 이해 시킬까 고민하지 않았다. 한국 그 자체가 콘텐츠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도 오리지널 스토리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차기작에 대한 욕심도 내비쳤다.

그는 한국의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며 딸의 육아와 인구 문제를 다루거나 고향 맨체스터에 대한 이야기도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일제에 반항적이었고 대립각을 세워 아버지 의친왕의 총애를 받은 차남 이우(李鍝, 1912-1945)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이 소설 에필로그에 등장한다.


다니엘 튜더 작가. 김영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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