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셀 화재 참사 50일 만에 정부가 특별감독 결과와 함께 제도 개선 대책을 내놓았지만,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는 "민관 합동 조사위원회로 다시 조사하라"고 반발하고 있다. 정부의 책임은 감추고, 참사를 부른 핵심 원인은 외면한 '맹탕' 대책이라는 비판이다.
"아리셀 참사 원인은 외국인근로자·사업장" 정부 책임은 어디에?
중앙사고수습본부는 지난 13일 '외국인 근로자 및 소규모 사업장 안전 강화 대책'을 발표했다.중수본부장을 맡고 있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번 참사의 원인을 "소규모 사업장의 취약한 안전관리 역량, 한국 문화에 생소하고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들에 대한 안전교육 부족 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이번 대책은 "소규모 사업장의 안전 관리 수준을 높이고, 외국인근로자들의 기초 안전보건교육을 강화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소개했다.
언어·문화 차이로 안전규칙을 잘 모르는 외국인근로자, 안전 관리 수준이 열악한 소규모 사업장이 사고 원인이었다는 주장에 참사를 부른 또다른 원인인 '정부'는 쏙 빠졌다. 정부의 기존 관리감독 체계에 대한 반성이 빠져 있으니, 대책 내용에도 정부의 변화를 모색하는 고민은 찾기 어렵다.
예컨데 노동부는 화재·폭발 우려 업종 중 최근 3년간 감독‧점검을 받지 않은 고위험 사업장 200개소를 우선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사업장들이 왜 3년 넘게 감독·점검을 받지 않도록 정부가 방치해왔는지에 대한 설명이나 개선 노력은 담기지 않았다.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고용노동부는 지난해와 올해 2년간 아리셀을 '고위험 사업장'으로 선정하고도, 단 한 차례도 감독·행정에 나서지 않았기에,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발생이라는 결과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며 "아리셀을 3년간 위험성평가 우수사업장으로 선정해 산재보험 감면혜택을 받도록 해준 것이 고용노동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대책위 한상진 대변인은 "동일한 유형의 폭발 사고가 계속 일어났음에도 정부가 아무런 조치 없이 놔둬서 결국 사업주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줬기 때문에 이런 대형 참사가 빚어졌다"며 "민간의 수많은 전문가들과 함께 아리셀 참사를 시작으로 합동조사기구나 민관 평가기구를 통해 논의해야 제대로 된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외국인근로자 '수박 겉핥기' 교육, 현장에서 도움될까…불법파견 등 구조적 문제는 언급 없어
대신 이번 대책에서 정부가 내놓은 핵심 대책 중 하나가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외국인근로자 뿐 아니라, 입국비자에 관계없이 국내에서 취업하는 모든 외국인이 기초적인 산업안전보건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내용이다. 또 아리셀이 위험성평가 인정심사를 통과해 산재보험료를 감면받기까지 했던 점을 고려해 위험성평가 요건을 강화하고 인정 기준을 상향하기로 했다.
하지만 위장도급·불법파견이 횡행해 내국인 노동자조차 사업장의 위험요인·대처법을 교육받지 못하는 현실을 그대로 둔 채 원론적인 기초교육을 제공하거나 위험성평가 요건만 강화해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이번 참사의 23명의 사망자 중 20명은 인력공급업체 메이셀을 통해 일용직 파견노동자로 일하면서 안전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민주노총은 "위장도급과 불법파견, 50인 미만 사업장 신고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피해 나간 아리셀 참사의 근본 문제에 대한 정부의 조사나 대책은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고 비판했고, 한국노총 역시 "이주노동자의 실질적인 산재예방을 위해서는 이주노동자 불법파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하며, 파견 노동자에 대한 안전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짚었다.
아리셀 화재 참사 피해자 법률대리인인 손익찬 변호사는 "외국인 희생자는 대부분 동포여서 한국어를 잘했다. 심지어 3동 2층 작업반장은 내국인 정규직 노동자인데도 화재 직후 소화기로 불을 끄려다 숨졌다"며 "현재의 고용 구조에서는 내국인이어도 안전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로, 지금 정부가 내놓은 실효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핵심 원인 '리튬-염화티오닐' 전지 관리책도 빠져…"화학물질 참사를 단순 화재 취급한 것" 비판
이번 참사는 아리셀이 생산하는 전지에서 불이 나 폭발했는데 노동자들이 대처방법을 몰라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즉 참사 원인의 근본에는 '전지(배터리)'가 있다.
아리셀 참사를 부른 리튬/염화티오닐(Li-SOCl2)은 화재시 대량의 염소·황산 가스를 방출해 한 두 모금만 흡입해도 사망할 수 있는 급성독성물질이다. 전지, 특히 1차전지에 담긴 채 고온·고압에 노출되면 배터리 폭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유사한 화재 사고가 수차례 발생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리튬/염화티오닐 1차전지로 인한 이번 참사는 '예고된 참사'라는 비판이 나온 터다.
이 때문에 대책위는 지난달 2일 발표했던 18개 요구안에서 1·2차 전지(배터리) 사업장를 전수조사 해 해당 산업을 PSM(공정안전관리제도) 대상으로 포함하고, 리튬 전지산업에서 사내외 하도급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PSM은 화학공장 등의 중대산업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유해·위험설비를 설치·이전할 때 사업주가 작성해 산업안전보건공단에 심사받도록 하는 강도 높은 규제다. 주로 정유·석유화학공장 등에 적용되나, 노동부가 정한 화학물질을 일정 용량 이상 다루면 PSM 대상에 오르기 때문에 대기업 전지 관련 공장들도 이미 상당수 PSM 제도가 적용된다.
하지만 정작 이번 대책에 전지에 초점을 맞춘 방안은 전혀 없는 것을 넘어,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날 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이 나오자 이 장관은 "리튬 배터리와 관련된 좀 더 기술적이고 고도로 특수화된 것은 8월 말 예정된 행안부에서 종합대책이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미국, 유럽의 PSM 대상 물질이 우리와 유사한 부분이 있는데, 리튬에만 국한하지 않고 신산업에 많이 쓰는 물질이나 물반응성 물질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확대해서 보려고 한다"며 "관련 연구 용역을 공고해 이르면 이번 달 안에 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민주노총 최명선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최악의 화학물질 사고인데 정작 이에 대한 대책은 없이, 단순한 화재 대책만 있다"며 "PSM 등이 빠지면서 사실상 이번 대책에는 '대책이 없다'고 본다"고 비판했다.
이어 "연구용역을 진행한다지만, 사실상 시간이 지나기만 기다리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며 "리튬 전지에 관한 산업이 위축될까 두려워 화재 안전 대책으로만 끊고 가는 것 아닌가 싶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