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보훈·역사 주요 기관에 뉴라이트 계열로 분류되는 학자들이 잇따라 임명됐다. 이에 광복회 등 독립유공단체는 반발하며 정부에서 주최하는 광복절 경축식에 불참하겠다고 했다. 광복회가 광복절 경축식에 불참하는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뉴라이트 인사로 지목된 신임 관장이 취임한 독립기념관은 개관 이래 처음으로 자체 광복절 기념식을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성을 부정하는 주장을 담아 학계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은 책 '반일종족주의'의 공동저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장에 임명됐다.
작년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에 이어 이번엔 광복절이 아닌 '1948년 건국절' 등을 추구하는 뉴라이트 인사들을 앞세운 윤석열 정부의 역사 논쟁이 또다시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리고 이 배경에는 '친일 지우기'가 있다는 학계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독립기념관장 "친일인명사전은 오류"…광복절 행사도 취소
최근 뉴라이트 논란을 빚거나 해당 계열로 분류되는 인사들은 독립기념관장 등 주요 요직을 꿰찼다.김형석 고신대 석좌교수가 독립기념관장에 이달 8일 취임했고, 이에 앞서 2월에는 박이택 낙성대경제연구소장이 이사로 취임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반도의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줬다'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의 전진기지로 통한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김형석 관장은 취임과 동시에 친일인명사전을 손 보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협력한 인물 4000여 명의 친일 행위와 광복 후 행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류가 많다는 것이 이유다.
김 관장은 기자들과 만난 첫자리에서부터 "친일인명사전의 내용들이 사실상 오류들이 있다"며 "잘못된 기술에 의해서 억울하게 친일 인사로 매도되는 분들이 있어선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박이택 이사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전쟁 등을 위해 한반도에 설치한 공장과 각종 농업 시설 등이 한반도의 경제 발전과 근대화의 바탕이었다고 주장한다. 일제 시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빠져나간 막대한 양의 쌀에 대해서도 수탈이 아닌 일정 돈을 받고 넘긴 '수출'이었다고 주장 중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도 논란에 휩싸였다. 주제척 역사관을 세운다는 목표로 출범해 한국학 연구의 본산으로 꼽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김낙년 동국대 교수가 취임했다. 김 교수 역시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을 맡은 대표적 뉴라이트 학자이며, 특히 일본군 위안부 강제성을 부정하는 주장으로 학계로부터 역사 왜곡 비판을 받은 '반일종족주의'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보훈과 역사 유관 기관을 장악한 가운데 독립기념관은 매년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던 광복절 기념식도 열지 않기로 했다. 1987년 개관한 이래 3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건국절 주장하는 뉴라이트…역사학계 "목적은 친일 지우기"
김 관장은 1945년 8월 15일이 광복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에 비로소 광복이 있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가 도마에 올랐다. 이는 앞서 본 반일종족주의의 저자이자 뉴라이트 학자인 이승만학당 교장 이영훈 교수의 건국절 주장과 맞닿아있다. 참고로 이영훈 교수와 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모두 학사와 석·박사 전공이 경제학이다.다수 뉴라이트 인사들은 8월 15일을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기념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만들어 기념하자는 것이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고, 대한민국 헌법(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이 이를 명시하고 있으며, 이승만 정부조차도 제헌헌법(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에서 1919년을 정부 수립일로 인정하고 있는데, 뉴라이트는 이를 1948년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학계에선 뉴라이트가 건국절을 주장하는 배경에 친일 행위를 지우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출범에 기여한 이들의 공을 드높이는 동시에 친일행위를 지우려는 행위라는 것이다.
박한용 역사학자는 "건국절 제정은 200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입법화가 시도됐지만 무산됐고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며 "뉴라이트에서는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이 아니라 해방 이후 3년 동안 좌익을 상대로 한 투쟁으로 대표되는 건국 투쟁을 통해 1948년에 만들어진 나라라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되면 건국 주체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해방 이후에 반공 투쟁에 나섰던 친일파 등이 된다"며 "한마디로 건국절 제정은 친일파를 건국 공로자로 세우자는 프로젝트"라고 짚었다.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까지…" 尹정부, 뉴라이트와 맞닿아"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8월에는 육군사관학교에 있던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 등의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계획을 밝혀 큰 논란이 일었다. 이유는 이념이었다.
홍 장군은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지만, 당시 독립운동 활동지가 소비에트 연방(소련) 영내여서 소련 당국과 협력하고 공산당에 입당했다. 당시 소련은 약소민족, 식민국가들의 독립운동을 돕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결국 윤 정부의 흉상 철거 계획 정책을 두고 근시안적 역사관을 넘어 항일무장 독립운동사 지우기라는 지적이 들끓었다.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의 항일무장 독립운동 지우기도 뉴라이트의 계획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인식이다. 성공회대 강성현 역사사회학과 교수는 "뉴라이트는 반일감정을 좌익사상과 연결하고, 항일무장 독립운동을 비판하며 이를 이승만의 독립운동으로 대체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의 독립운동은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는 공산 전체주의 국가가 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말한 바 있다"며 "윤석열 정부는 독립운동을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건국 운동으로 정의해 홍범도 장군 등이 참여했던 항일무장 투쟁을 지우는 방식으로 뉴라이트 사상을 드러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1948년 8월 15일에 광복이 있었고, 또 친일인명사전을 손 보겠다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주장은 상당 부분 뉴라이트와 연결돼있다.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로 구성된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하는 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독립기념관장 추천 위원장을 형사 고발하기로 했다.
한편 반발 기류 속에서 김 관장은 12일 기자회견을 열고 "저는 독립운동가를 폄훼하고 일제 강점기 식민지배를 옹호한다는 의미로 말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만약 정부나 여당이 건국절 제정을 추진한다면 직을 걸고 반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역사학자의 양심을 걸고 분명히 반대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