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구성원들 및 시민사회단체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 다큐멘터리 영화 '기적의 시작' 광복절 방영을 저지하고 나섰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이하 KBS본부)는 12일 서울 여의도 KBS 사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적의 시작'에 대해 "8·15 광복절을 맞아 사측이 특별히 준비하고 있는 영화"라며 "최근 10여년 간 (KBS) 영화 구매 데이터를 살펴보니 2만여명의 최저 관객수 영화"라고 소개했다.
일단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그 동안 양질의 독립영화들을 소개해 온 KBS 1TV '독립영화관' 프로그램 취지 및 수준과 맞지 않는다는 것.
KBS본부는 "저예산 다큐 영화임을 감안하더라도 과연 영화라고 부를 정도의 수준이 되는지 의문이 드는 영상물"이라며 "90년대 재연 방송에서나 나올법한 조악한 내레이션과 자막 폰트, 노래방 화면을 연상시키는 재연 장면까지. 독립영화 인증을 신청했지만 이조차 받지 못했다. 왜 이런 영화를 웃돈을 줘가며 비싸게 구입해 광복절에 방영하려고 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실제 영화진흥위원회가 '기적의 시작' 제작사에 보낸 독립영화 불인정 통지서를 보면 '객관성이 결여된 인물 다큐멘터리로 독립영화 인정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에 불인정함'이란 사유가 적혀 있다. 이처럼 가장 중요한 내용 역시 극우 성향 인사들의 주장과 관점으로 이뤄져 있다는 전언이다.
KBS본부는 "이승만을 친일파나 독재자로 평가 받아서는 안 되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 대통령 한 분의 지대한 업적'으로 표현되며, 3·15 부정선거나 4·19 혁명은 밑에 사람들이 잘못해서 벌어진 '누명'이며 하야는 '위대한 결단'으로 포장된다. 제주 4·3과 여순사건을 남한 내 좌익세력이 주도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건설을 방해한 사건으로 규정한다"라며 "한국 현대사의 논쟁적 인물을 다루면서도 최소한의 균형 감각과 성찰 없이 칭송과 미화 뿐인 정치적 선전물"이라고 지적했다.
편성부서 제작진들은 이 같은 문제점을 수차례 보고·반발했지만 편성본부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역사 다큐가 아니라 영화"이기 때문에 인물의 공과에 균형을 꼭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답변과 함께 "문제가 되는 부분은 편집을 할 계획이고, 감독에게도 승낙을 받았다"라는 이야기만 돌아왔다. 편성본부 측은 "작품이 투박하고 단순한 느낌이지만 의미로 가는 영화"라며 메시지에 주목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KBS본부는 "'기적의 시작'은 다큐가 아닌 영화이기 때문에 공정성 시비나 각종 리스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라며 "처참하다. '다큐멘터리 영화'와 '극 영화'를 분간하지 못하는 무지함에 말문이 막힌다. 덕지덕지 편집을 해야 하는 콘텐츠를 왜 기를 쓰고 방영하려 하는지 이해 불가"라고 비판했다.
이어 "내용,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도저히 방송을 용납하기 힘든 수준의 영화를 구매 지시하고 방송을 강행하도록 결정한 이가 누구인지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해 '기적의 시작'은 방영되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며 "KBS를 편향적 역사관을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시도를 이어간다면, 국민과 연대해 이번 방영을 주도한 박민 사장과 수뇌부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또한 "KBS의 이승만 찬양 영화 상영은 소위 '뉴라이트' 세력이 대한민국 일부 역사학계가 아니라 주요 역사 관련 기관 단체의 요직을 잠식해 가는 윤석열 정부의 상황의 연장선일 뿐"이라며 "이제라도 KBS 박민 사장과 KBS 관련자들은 '이승만 찬양 방송'이라는 전파낭비를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방영 중단을 촉구했다.
역사학자들 "이승만은 독재자…日 우익 논리가 영화에"
역사학자들은 '기적의 시작'이 어떻게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과오를 왜곡·미화하고 있는지 본격적으로 짚었다.
'대한민국 현대사' 저자인 주철희 역사연구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전했다.
그는 "이승만은 발췌개헌(1차)으로 국회를 무력화했고, 사사오입 개헌(2차)으로 권력자 힘으로 헌법을 제멋대로 해석, 스스로 3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헌법 질서를 처음 파괴한 사람이 이승만"이라며 "9차례 헌법 개정에서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위해 헌법 질서를 문란하게 하거나 파괴하면서 개정한 권력자를 독재자라고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국체를 훼손한 행위자는 독재자라고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밝혔다.
3·15 부정선거에 대해서는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이 저지른 부정선거"라며 "이는 관권(경찰·공무원)이 동원된 선거이다. 경찰과 공무원 관권이란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몫이지 자유당의 몫이 아니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으로 선거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라고 책임 소지를 분명히 했다.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한 위대한 애국자인데, 다만 주위의 간신배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렸기에 독재자가 됐다'는 주장은 이승만 집권 당시부터 지속된 우상화 작업의 결과물"이라며 "이승만은 부정선거 직후 경찰의 폭압과 선거 부정에 저항해 마산 의거에 참여한 학생들의 행동을 공산주의자의 선동 탓이라고 주장하면서 색깔론을 동원해 탄압했다"라고 설명했다.
'기적의 시작'에서 이승만의 하야를 '구국의 위대한 결단'으로 치켜세운 것 역시 "4월 혁명의 성과를 이승만에게 돌리고, 민주시민과 학생 학살 책임, 헌정질서 파괴 책임을 면책시키려 하는 시도"라며 "이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책하는 일본 우익들의 논리, '성단론'(聖斷論)과 같은 맥락"이라고 일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