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가 연내 출시를 예고한 차세대 제품에서 설계 이상이 발견되면서 국내 반도체 업체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발(發) 경기침체 우려와 빅테크 기업들의 AI투자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엔비디아에 악재가 겹치며 'AI붐'의 대표적 수혜 제품으로 꼽히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업계에서는 현재 시장 수요 대부분이 해당 제품과 연관성이 크지 않아 최근 사태가 당장 한국 반도체 기업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인 것으로 보면서도, 이후 시장 향배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양새다.
"성능 30배·전력 25분의1" 엔비디아 차세대 제품, 결함으로 양산 연기
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블룸버그통신과 미국의 정보기술(IT) 전문지 디인포메이션은 최근 MS(마이크로소프트) 관계자를 인용해 "엔비디아가 최근 고객사에 AI 가속기 블랙웰의 '설계 결함'을 알렸다"고 보도했다. 엔비디아는 당초 올 하반기(7~12월) 블랙웰 본격 양산에 돌입할 예정이었으나 그 시점이 내년 1분기(1~3월) 이후로 미뤄졌다는 것이다.블랙웰(Blackwell)은 엔비디아 젠슨 황 CEO가 지난 6월 대만에서 열린 컴퓨텍스에서 공개한 차세대 AI가속기다. AI 가속기는 AI 데이터센터에 필수적인 반도체패키지로 GPU(그래픽처리장치)와 HBM(고대역폭메모리) 등을 합쳐서 만든다. 디인포메이션은 "블랙웰 AI 가속기의 납품이 석 달 이상 지연돼 2025년 1분기나 돼야 고객사에 인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제품은 GB200인 것으로 전해졌다. 블랙웰 시리즈는 GPU에 192GB(기가바이트) 용량 5세대 HBM(HBM3E) 8개를 패키징한 'B100', 'B200'과 B200 2개에 CPU(중앙처리장치)까지 붙인 'GB200'으로 구성된다. GB200은 최상의 모델이다.
앞서 엔비디아는 블랙웰과 관련해 "전작 대비 성능이 최대 30배 뛰어나고, 같은 성능을 구현할 때 소비전력은 25분의 1 수준까지 낮출 수 있다"고 밝히며 전작(H100)보다 30% 이상 비싼 4만달러(5400만원) 수준으로 가격을 책정했다. 고가에도 불구하고 MS와 구글 등 고객사들은 각각 수십조원에서 100조원에 이르는 GB200 주문을 냈지만, 제품 출시가 미뤄지면서 이를 활용한 각사의 AI서비스 출시도 지연될 전망이다.
다만 엔비디아는 관련 보도를 부인하며 정상적으로 블랙웰 생산이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엔비디아 대변인은 "블랙웰 공급은 올 하반기부터 늘어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하지만 엔비디아는 미국발 경기 침체 공포에 직격탄을 맞으며 연일 주가가 곤두박질 치고 있고 미국 법무부가 엔비디아의 반(反)독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조사중이라는 보도까지 나오면서 악재가 이어지는 모양새다.
공급망 연쇄 영향 전망에 삼성·SK 주가 급락
겹악재로 고전해온 엔비디아에 제품 결함 이슈까지 더해지면서 관련 공급망에 속해있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도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블랙웰에는 HBM 5세대인 HBM3E 제품이 탑재될 예정이다. SK하이닉스는 해당 제품을 지난 3월부터 양산해 엔비디아에 납품하고 있고, 삼성전자도 납품을 위해 엔비디아의 퀄테스트(성능 검증)를 진행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HBM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46~49%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삼성전자 주가는 이날 종가 기준 7만1200원으로 전날보다 무려 10.55%가 떨어졌다. 삼성전자 주가가 10% 이상 하락한 것은 2000년대 IT버블 붕괴와 2008년 금융위기 때 등이다. AI랠리를 타고 엔비디아와 함께 주가가 급등했던 SK하이닉스는 4개월여 만에 주가가 15만원대로 주저 앉았다. SK하이닉스는 지난 7월 11일(24만1천원) 이후 주가가 계속 빠지고 있다.
업계 전문가 "큰 변수 아냐, AI 전체 시장 커지는건 분명"
다만 반도체 업계에서는 엔비디아의 최근 악재가 국내 기업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까지 시장 수요 대부분은 2022년 출시된 '호퍼' 시리즈이고, GB200 납품을 위한 HBM 인증 작업도 본격화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설령 현지 언론 보도대로 GB200 출시가 3개월 미뤄진다고 해도 수요 급증으로 HBM 캐파(생산능력) 확대까지 예고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큰 변수가 아니라는 것이다.한 업계 관계자는 "AI시장이 본격적으로 태동 했다고 보기 어렵고 향후 시장 등락이 있을 수 있겠지만 시장이 커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엔비디아가 제기된 결함 이슈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차분히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제품 출시가 미뤄진다고 해도 당장 다른 기업이 엔비디아를 대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제품 양산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서비스 출시 시점이 연기될 수는 있겠지만 이번 사태가 국내 반도체 기업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하는 건 너무 나간 이야기"라며 "자본 시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지는 모르겠지만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펀더멘탈(기업가치)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업들의 경영 전략이나 제품 전략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대차증권 곽민정 연구원도 "향후 생산될 블랙웰 시리즈, 특히 B200과 GB200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견조한 상황"이라며 "현재 HBM 제조 업체들에 영향을 주는 상황은 아는 것으로 파악되며 이와 관련한 수요와 고객사 공급 스캐쥴도 변함없이 견조하다"고 평가했다.
산업연구원 김양팽 연구원도 "엔비디아가 AI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긴 했지만 AI 전체 시장과는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며 "엔비디아에 대한 투자가 있고 이에 대한 조정은 좀 있을 것 같지만 구글과 MS, 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들이 자체적인 칩을 만들려고 하는 수요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최근 엔비디아 사태가 국내 반도체 기업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